올해 초부터 규제 강화하자 개인명의 계좌 직접 노려 사기
대포통장 절반이 20ㆍ30대, 고수익ㆍ단기 알바 내세워 유혹
지난 6일 온라인 구직 사이트를 둘러보던 이모(28)씨는 자신의 계좌가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에 쓰일 뻔한 아찔한 경험을 했다. A업체 직원을 사칭한 김모(21)씨는 “가상화폐 ‘비트코인’ 구매대행 업체와 거래한 회사자금을 당신 계좌로 입금할 테니 이를 인출해 오면 일당을 주겠다”고 접근해 왔다. 생활비 마련이 급했던 이씨는 신원 및 계좌 정보를 김씨에게 건넸고 얼마 지나지 않아 3,000만원이 입금됐다. 하지만 이씨는 전화로만 업무지시를 하는 김씨 행동에 의심을 품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 수사관들은 이씨의 협조를 얻어 이날 오후 영등포역 물품보관함에 가짜 돈뭉치를 미리 넣어두었다가 이를 꺼내는 김씨 등 2명을 검거해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조사 결과 이씨 통장으로 입금된 돈은 김씨 일당이 검찰을 사칭해 정모(24ㆍ여)씨 등 2명에게서 가로챈 보이스피싱 수익금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13일 “사기범들이 최근 대포통장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취업이 급한 젊은이들의 명의를 도용해 범죄에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 법 개정으로 대포통장 규제가 강화되면서 ‘계좌를 만들어 넘기면 돈을 주겠다’고 광고해 대포통장을 모집하는 일이 어려워지자 교묘하게 개인들을 속여 계좌정보를 넘기게끔 만드는 범죄가 늘고 있다. 일자리를 찾는 20,30대 취업준비생들이 사기범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대포통장 명의자(1만2,807명) 중 20,30대 청년 비중은 절반(49.4%)에 달했다.
지난 1월 시행에 들어간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은 대포통장을 사고 파는 행위뿐 아니라 광고까지 금지했다. 매매 광고를 할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처럼 대포통장 개설이 까다로워지자 사기범들은 온라인 구인게시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고수익ㆍ단기 아르바이트’ 등의 글을 올려 젊은 구직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출입증을 만든다며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거나 물품 대금을 대신 받아주면 사례를 지급하겠다고 꾀는 식이다. 취업준비생 박모(24ㆍ여)씨는 “급여 수준이 높은 구인 광고를 보고 전화했더니 회사 출입증을 만들기 위해 체크카드 및 계좌번호를 달라고 했다”며 “이력서 뒷면에 계좌 비밀번호를 적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사기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일부 사기범들은 구직자 개인정보로 유령회사까지 세워 대포통장을 수백개씩 유통하기도 한다. 지난달에는 취업준비생 등 명의로 유령 법인을 만들어 대포통장 400여개를 개설ㆍ판매해 60억원을 받아 챙긴 일당이 구속되기도 했다. 서울 한 경찰서 수사관은 “휴대폰 케이스에 액세서리를 다는 아르바이트 구인광고에도 물품 보증금이 필요하다며 카드정보를 내라는 조건을 달아 구직자를 대포통장 명의자로 만드는 등 수법이 점차 교묘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기범들이 활개치고 있지만 적발은 여전히 쉽지 않다. 대포통장 양도 자체가 불법인 탓에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가 많고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온라인 거래를 잡아내기도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구인광고만 봐서는 누가 타인 명의를 가로채 대포통장을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금융전문가들은 취업준비생의 절박한 심리를 악용한 범죄를 근절하려면 개인정보 도용에 대한 처벌 수위를 대폭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기동 금융범죄예방연구소장은 “대포통장을 금융사기에 이용하는 피의자 중 상당수는 우발적 범죄임을 내세워 벌금 정도의 처벌을 받고 있다”며 “금융범죄의 고의성 판별 기준을 세분화해 일반 형사사건과 동등한 수준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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