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철 설악은 언제나 진리다. 단풍 소식의 맨 앞자리는 항상 설악산 차지다. 첫 단풍은 산 전체의 20%, 절정기는 80% 가량이 물들었을 때를 기준으로 삼는데 올해 설악은 20일경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46년 만에 망경대 코스를 개방해 설악산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가는 길에 인제 자작나무숲을 들렀고, 돌아오는 길에 홍천 은행나무숲을 거쳤다. 미리 본 강원의 3색 가을을 전한다.
▦아래도 위도 역시 설악, 주전골과 망경대
46년 만에 열린 망경대 코스는 공교롭게도 딱 46일간 개방한다. 다음달 16일 등산로가 폐쇄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지난 주말 이틀간만 1만 9,000여명이 몰렸다. 극심한 산길 정체를 각오해야 한다는 얘기다.
코스는 설악산국립공원 등산로 중에서도 쉬운 편에 속하는 오색분소에서 출발한다. 오색약수~주전골~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까지 3.2km는 기존 등산로를 이용한다. 이곳에서 망경대를 거쳐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2km 구간이 이번에 개방한 코스다. 망경대만 가려면 오색주차장에서 택시로 이동해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도 상관없다. 단, 망경대 코스는 일단 들어서면 되돌아올 수 없다. 길이 좁고 안전을 감안해 일방통행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안개에 휩싸인 이른 아침 오색주차장을 출발했다. 이곳부터 용소폭포까지를 주전(鑄錢)골 이라 부른다. 옛날 10여명의 무리들이 동굴에서 위조엽전을 만들다 발각된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계곡을 건너거나 미끄러운 곳은 다리와 데크를 놓아 대체로 수월하다.
주전골 시작부터 설악의 진면목을 만난다. 철분이 많아 붉은 색을 띠는 오색약수 옆 암반을 흐르는 물결이 옥색 구슬이다. 눈을 즐겁게 하는 약수는 계곡을 걷는 내내 이어진다. 초입에 우뚝 솟은 독주암을 시작으로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계곡을 감싼 바위산과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뿌리내린 소나무가 그대로 선경이다. 매끄러운 바위를 흐르는 맑은 물소리까지 시원해 지루할 틈이 없다. 낙차가 있는 곳마다 선녀탕, 용소폭포 등이 짙푸른 소를 만들어 위아래 경치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는다. 이따금씩 만나는 단풍나무도 가을 본색을 뽐낸다. 30년 만에 다시 주전골을 걸었다는 김칠두(68)씨는 ‘작은 장자제(長家界)를 보는 것 같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실 단풍으로나 경치로나 국립공원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곳은 주전골이 끝나는 용소삼거리에서 등선대에 이르는 흘림골 코스인데, 낙석 위험으로 무기한 통제된 상태다. 망경대는 그 아쉬움을 대신하는 코스다.
이 코스는 오직 하나의 풍경만 바라고 가는 길이다. 주전골을 걸으면서 고개를 쳐들고 감탄을 연발했던 봉우리들을 엇비슷한 눈높이에서 한꺼번에 조망하는 곳이 바로 망경대다. 임시로 개방한 터라 부족함이 많다. 앞 사람을 추월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은 비좁고, 진 땅이 많아 미끄럼에 주의해야 한다.
사실 ‘46년’이라는 의미를 제외하면 그렇게 욕심부릴만한 코스는 아니다. 초입의 짧은 숲을 지나면 560m 정상까지는 급경사가 이어지고, 오색약수로 내려오는 길은 더 가파르다. 이른바‘가성비’로만 따지면 주전골 보다 한 수 아래다.
그러나 망경대에서 펼쳐지는 경치만은 나무랄 데 없다. 멀게는 점봉산 가까이는 한계령까지 첩첩이 쌓인 바위봉우리가 만물상을 이루고, 흘림골과 주전골로 치마폭처럼 흐르는 풍광 하나하나가 한 폭의 그림이다. 좋은 경치를 조망하는 곳이라는 뜻의 망경대(望景臺) 보다는 1만 가지 풍경이 어우러진 곳, 즉 만경대(萬景臺)가 옳다는 주장도 있지만 자연의 신비로운 붓 놀림 앞에서는 부질없는 논쟁이다.
▦순백이 뿜는 순수의 감동, 인제 자작나무숲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젊은 숲이다. 1988년 솔잎혹파리 피해로 소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이듬해부터 시베리아 원산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했으니, 가장 오래된 나무도 30살이 되지 않는 이주민인 셈이다. 이후 2012년부터 일반에 개방해 불과 몇 년 사이에 전국적인 숲으로 성장했다.
41만 그루 자작나무숲은 먼 발치에서도 확연히 구분될 만큼 규모가 크지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은 일부다.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곳은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해발 700m 능선부근에 형성된 구릉지대다.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4km, 3km는 경사가 완만한 임도를 따라 걷지만 나머지 1km는 다소 가파른 등산로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어둑어둑하던 숲이 갑자기 환해진다. 자작나무 하얀 껍질이 원근감을 무시하며 수직 수평으로 순백의 향연을 펼친다. 현기증 나도록 황홀하다. 나무도 영혼을 가졌다는 말을 실감한다. 숲의 정령이 어슬렁거리는 듯하다. 이곳에선 기념 사진을 찍는 것 외에 딱히 할 것도 없다. 그저 멍하니 숲을 응시하거나 바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을 뿐이다.
애초에 목재를 생산하기 위한 용도로 조성했지만 순백의 기운에서 뿜어내는 순수의 감동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최근엔 그 첫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예비부부들이 웨딩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많이 찾는다.
11월 1일~12월 15일까지 산불예방기간에는 입산통제가 예고돼 있다. 개방 여부는 강수량과 습도 등 기후상황을 고려해 이달 말에 최종 결정한다. 문의: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14.
▦노랗게 물드는 추억, 홍천 은행나무숲
홍천군 내면 은행나무숲은 시월 딱 한 달만 개방한다. 오대산 자락이어서 10월말이면 첫서리가 내리고 잎이 모두 떨어지기 때문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바닥에 깔리는 절정의 가을 풍경은 20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2,000그루나 심겨진 전국 최대 은행나무숲이지만 이곳은 국가나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숲이 아니라 사유지다. 1985년부터 가꾼 개인 정원을 2010년부터 매년 일반에 개방하고 있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홍천 내면에서 양양 서면을 잇는 도로 바로 옆이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이곳의 최대 장점. 덕분에 예쁜 사진을 남기려는 연인들, 아이와 어른을 동반한 가족, 다시 한번 추억 쌓기에 나선 오래된 동창생 등 모든 연령대의 여행객들이 두루 찾는다. 새로 주차장도 만들어 길가에 차를 대야 했던 불편도 덜었고, 은행나무숲으로 통하는 길 반대편으로는 계방천을 따라 코스모스 산책길도 조성했다.
설악산 오색지구에서 이곳까지 가장 빠른 도로인 56번 국도는 해발 1,013m 구룡령을 넘는다. 미천골에서부터 구불구불 오르며 산자락을 타고 내리는 단풍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다. 전망대가 한 곳도 없다는 게 야속할 정도다. 다행히 통행량이 많지 않아 오르막차로 몇몇 지점에 잠시나마 주차할 공간은 있다.
인제ㆍ양양ㆍ홍천=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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