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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국가의 자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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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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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정부의 ‘낙태 전면 금지법’ 추진에 항의하는 시위에 여성들이 들고 나온 그림. 개인의 ‘출산ㆍ낙태 결정권’을 무시당하는 현실을 비꼬았다. 로이터
폴란드 정부의 ‘낙태 전면 금지법’ 추진에 항의하는 시위에 여성들이 들고 나온 그림. 개인의 ‘출산ㆍ낙태 결정권’을 무시당하는 현실을 비꼬았다. 로이터

다음은 21세기 대한민국 기혼 여성에 대한 ‘자학적인’ 분류법이다. ① 집에서 애나 보며 노는 여자 ② 애 맡기고 출근해서 눈치 보는 여자 ③ 애 안 낳은 이기적인 여자.

③에 속한 결혼 4~10년 차의 여성 6명(30대 5명ㆍ40대 1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에겐 임신과 출산을 미루거나 아이 없는 삶을 택한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그럼에도 가부장제는 이들에게 ‘자기밖에 모르는 출산 파업자’‘저출산ㆍ노령화 디스토피아의 주범’이라는 획일적이고도 부당한 혐의를 씌웠다.

“도대체 내 생식 능력이 왜 회식 자리에서 안주가 돼야 하나요?”(인터뷰 응답자 A) 임신과 출산에 관한 한, 여성들에겐 사생활도 인권도 없다. 애를 안 낳는 거니, 못 낳는 거니? 병원에는 가 봤니? 시댁에서 허락은 받았니? 여자로 태어났으면 애는 낳아 봐야 하지 않겠니? 6명 모두가 지긋지긋하게 들었다는 질문들이다.

“오늘 밤에 깨끗이 씻고 꼭 잠자리 해라.”(시어머니) “여자가 뭐 한다고 아직도 애를 안 뱄노?”(출입처 취재원) “남편이 몰래 묶은 거 아니야?”(직장 상사) “소다로 뒷물하고 한방에 임신하는 케이스들이 있다던데….”(초면의 클라이언트) 선의와 친밀함의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가해지는 막말 폭력은 이들이 받은 어이 없는 형벌이다.

여성들이 이처럼 무참한 간섭에 시달리는 것은 임신과 출산을 공동체 구성원의 일방적 책무로 보는 낡은 인식 탓이다. ‘생식 결정권’은 페미니즘 책에나 나오는 얘기다. “자궁을 남편의 가문과 사회를 존속시키는 데 쓰이는 공공재로 여기기 때문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응답자 B) “육아 부담을 평생 떠안아야 하는 당사자인 여성의 선택권은 존중 받지 못해요.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건데, 출산 파시즘 아닌가요?”(응답자 C)

인구 절벽을 코앞에 두고 호들갑을 떠는 이 사회는 출산에 따른 양육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세계 최저 수준의 합계 출산율(2015년 1.25명)과 대한민국 인구 소멸 예상 시기(2750년), 노동력 부족이 본격화되는 해(2030년) 같은 숫자를 들이밀어, 가뜩이나 고달픈 여성들을 몰아붙일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이 보육은 나라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라”(2012년 12월 16일ㆍ대선후보 토론회)는 말은 허언이 됐다. 5살 이하 영ㆍ유아 무상 보육 공약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육아와 양육 문제가 정치권의 최우선 과제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성 신화에 기댄 여성 노동력 착취로 육아를 해결하는 낡은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어요. 아이의 존재는 더 없는 축복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비참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아요.”(응답자 D) “모성애를 떠받들면서도 엄마는 혐오하는 이율배반의 시선이 두려워요. 공공장소에서 애가 울면 맘충(Mom+蟲ㆍ개념 없는 극성 엄마),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에 맞춰 칼퇴근 하면 민폐 여직원, 독박 육아에 지쳐 아이 낳은 것을 잠시 후회하면 나쁜X이 되죠.”(응답자 E) 과연 이런 사회에 아이 낳기를 강요할 염치와 자격이 있는가.

불안한 일자리ㆍ치솟는 집값ㆍ걱정스러운 노후가 종족 보존의 본능을 압도한 시대에, 비(非)출산을 선택한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저출산 문제의 온당한 해법이 아니다. 죄를 물을 대상은 출산과 보육의 의무를 여성들에게 떠넘겨 장시간 노동과 경력 단절의 짐을 지운 무책임한 국가 시스템이다. 육아의 책임을 국가와 사회가 더 많이 부담해 아이를 낳고 키울 시간과 돈과 노동력을 부모에게 충분히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누가 아이를 키울 것인가’의 문제다. 내년 대선에서 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내 자궁은 나의 것!”(응답자 F)이라는 외침이 상징하는 여성들의 분노와 좌절을 누가 달랠 것인가.

최문선 정치부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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