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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어지간한 정치는 멀어지고

입력
2016.10.0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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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선례만 자꾸 쌓이는 극단 정치

여소야대 3당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

이대로는 차기 정부도 암울할 수 밖에

예상은 했지만 여소야대 3당 체제가 국민에게 비전을 보여주는 게 없다. 대화와 타협, 협치를 하라는 국민의 명령이라고 떠들더니 벌써 듣기 좋은 립서비스로 전락했다. ‘어지간해야 생원님하고 벗하지’라는 속담처럼 여야는 서로 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낙인 찍는 형국이다. 20대 국회가 출범한 4개월여 동안 무엇 하나 과하지 않은 게 없는 탓이다.

야당이 주도하는 상임위의 단독 처리와 여당의 발끈함을 본 게 벌써 두 차례다. 13년 만에 야당 주도로 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되고, 대통령은 전례 없이 거부의사를 드러내 결국 유야무야 됐다. 해임건의안 표결 처리 과정에서는 초유의 국무위원 필리버스터가 빚어졌고, 여당은 국회의장의 중립성을 시비 삼아 정치파업을 벌였다. 개회사부터 중립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야당 출신 국회의장은 정쟁의 한 복판에 섰다. 당적 보유금지 하나로도 충분한 국회법상 의장의 중립 의무와 징벌을 애써 규정하겠다고 나서는 게 또 다른 정쟁을 불러일으킬 조짐이다. 여당 대표는 “의장이 사퇴하든지, 내가 죽든지”라는 결사항전의 각오로 단식에 임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다.

과거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 거듭된다. 다수 야당의 근육질 자랑과 소수 여당의 과잉반응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무엇 하나 어지간하게 넘어가는 게 없다. 앞으로 또 무슨 해괴한 정치 행위가 있을지 예측을 불허한다.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수그러들던 정치인의 막말이 되살아나고, 여의도 정치를 주도하는 이들의 말 하나하나에도 날이 잔뜩 서 있다. ‘도발만 해라,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선명하다. 몸싸움만 하지 않는다 뿐이지 동물 국회와 식물 국회가 한데 뒤엉킨 괴상한 국회가 죽 이어진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

옛 사람의 경계가 하나도 틀림이 없다. ‘눈길 함부로 걷지 마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설야’(雪野)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한시가 이 어지러운 정치에 시사하는 바는 뚜렷하다. 나쁜 선례가 자꾸 쌓이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행위들의 보복적인 답습을 예고한다.

눈 앞의 이익에 매몰된 ‘스냅 샷’정치로는 경솔한 수를 두기 마련이다. 덜컥수가 묘수가 되는 경우는 없다. 결국 자충수가 돼 스스로를 옥죄게 돼 있다. 박근혜 정부 임기는 물론이고 지금의 여든, 야든, 어느 정권이 차기 정부를 맡더라도 지금의 정치 행태와 수준으로는 최소 2년 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으레 그렇듯이 제 사람을 요직에 심는 정도의 떡고물에 만족한다면 모를까 뜻을 펼 수 없는 식물 정부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식물 국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피폐한 나라와 골병 든 국민이다.

고집 센 아이가 생떼를 쓸 때마다 어른들은 한 소리를 한다. 누구라도 들었을 법한 “어지간히 해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도 멈추지 않는다면 얻는 것은 매타작이거나 집 밖으로 쫓겨나는 길 외에 없다. 그 말의 뜻이 오묘하다. 행위의 정도가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보통 수준이거나 조금 더 한 정도다. 공자 사상의 정수(精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리말 버전이다. 고대 민주주의의 산실인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쓰인 경구도 ‘Meden Agan’ 즉 무엇이라도 도를 넘지 말라고 적혀 있다. 지나침에 대한 경계는 동서고금을 꿰뚫는 생활의 지혜이자 방식이다.

과열된 충돌이 여소야대 3당 체제의 초기에 나타나는 일종의 ‘간 보기’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어느 당이나 정체성 혹은 충성을 내세워 극단에 치우친 인사가 유달리 많아 보이고, 목소리도 크다. 청와대마저도 오기로 똘똘 뭉쳐 있다. 하지만 극단을 통제하고 ‘어지간한 정치’를 하기에는 여야의 권력 중심이 가진 영향력이나 자율성이 미치지 못한다. 여야의 수뇌부마저 극단에 서고, 휘둘리는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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