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거장이 생각하는 공포영화의 현주소는 어떨까. ‘도플갱어’ ‘로프트’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등 공포영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 구로사와 기요기(61) 감독이 최신작 ‘은판 위의 여인’으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판타스틱한 공포물인 ‘은판 위의 여인’은 부산영화제의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8일 부산 해운대구 동서대 센텀캠퍼스에서 열린 ‘은판 위의 여인’ 기자회견에서 ‘공포영화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글쎄요”라고 답한 뒤 “일본에서도 공포영화가 그다지 인기가 없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붐은 사라졌을 지 모르지만 (공포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이 된 게 아닌가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이어 “요즘 영화계도 공포 분위기의 영화를 찍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생각한다”며 “호러도 이제는 아주 일반화된 장르가 됐다”고 설명했다.
1983년 ‘간다가와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감독은 가족 드라마나 범죄스릴러, 공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 2003년 ‘도플갱어’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으며, ‘도쿄소나타’(2008)로는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해안가로의 여행’(2015)으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감독상의 영예를 안았다. 특유의 따듯한 감성으로 세계 굴지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팬들은 ‘로프트’(2005) ‘도플갱어’ ‘회로’(2001) ‘강령(2000) 등 섬뜩한 공포영화에 열광한다.
‘은판 위의 여인’도 실물 크기의 은판으로 인물 초상을 찍는 19세기 사진 촬영방식을 고수하는 프랑스의 사진작가 스테판과 그의 조수로 고용된 장의 이야기다. 스테판은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딸 마리에게 자세 교정기까지 사용하며 장시간 자세를 유지하도록 강요한다. 점점 지쳐가며 아버지를 떠나려는 마리와 그런 마리를 사랑하게 된 장, 사진이 인생의 전부인 아버지 등 세 사람을 통해 사진을 매개로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그린다. 이 영화가 공포로 분류되는 건 죽은 것으로 묘사되는 스테판의 아내가 혼령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는 굉장히 오래 전부터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공포물 등을 여러 번 촬영하다 보니 귀신, 유령을 다루게 됩니다. 유령은 또 다른 사람의 정체라고 생각해요. 유령은 곧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죽으면 유령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영화를 찍으면서 과연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됐죠.”
이처럼 구로사와 감독에게 유령은 특별한 소재다. 공포스럽게 비춰지기도 하지만 신비로운 이미지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에서 딸 마리의 역할이 그러했다. 신예 콘스탄스 루소는 유령의 존재처럼 묘사되는 딸 마리 역에 신비로운 이미지를 배가시켰다. 특히 스크린에 클로즈업 된 그녀의 눈동자는 좌우로 미세하게 떨림을 전하며 삶과 죽음의 몽롱한 경계를 표현하듯 그려졌다.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을 의도해서 찍은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참으로 우연인데, 이 배우가 눈이 흔들리는 체질이라고 하더라. 그녀의 아버지도 (눈동자가)그렇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긴장하거나 피곤하면 눈동자가 불안정해진다고 했다. 눈동자는 스스로 컨트롤 하기 어려운데 나로서는 딱 좋을 정도로 영화 속 딸의 불안이 그려져 좋았다”며 “몸은 고정돼 있지만 그 안에서 억제되고 짓눌리고 있는 욕망 등을 눈으로 표현한 듯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내 “눈을 보고 캐스팅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흥미로웠다. 아마 연기로 하라고 해도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은판 위의 여인’은 구로사와 감독의 인생 도전작이기도 하다. 일본인 감독이 프랑스에서 현지 배우, 스태프와 함께 작업해 완성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 영화를 찍는 경험을 했다”는 그는 “이제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지만 프랑스에서 영화를 할 수 있어서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도 했다. 스스로도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프랑스는 외국인 감독이 자신의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찍을 상당한 자금을 지원해준다. 영화 하기 상당히 좋은 나라”라고 흥미로워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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