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설리 : 허드슨 강의 기적’은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실제 항공 사고를 다룬 영화다. 2009년 1월 15일 150명의 승객을 태우고 뉴욕 라가디아 공항을 출발한 미국 국내선 항공기가 이륙 직후 뉴욕 상공에서 새떼와 충돌하여 양쪽 날개의 엔진을 잃는다. 40년 경력의 기장 설렌버거(설리)는 관제소와 교신하며 회항을 시도하지만, 곧 라가디아 공항은 물론 인근 공항으로의 회항 역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부기장과 함께 그가 내린 선택은 허드슨 강으로의 비상 착수(着水)였다. 기적이었다. 조종사와 승무원 포함 155명 전원이 생존했다. 승무원 한 명이 열상을 입은 것 외에 부상자도 없었다. 금융위기의 어두운 소식과 함께 새해를 시작해야 했던 미국민들은 환호했고, 설리는 ‘영웅’이 되었다.
영화를 보며 뒤늦게 떠올리게 된 거지만 당시 뉴스로 접하며 내게도 얼마간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고 당시의 정황이나 구조 과정 등 절박했던 시간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7년 전 사건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전해주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심과 통찰은 깊이 마음을 흔들었다. 비행기가 뉴욕 고층 빌딩 숲에 부딪치며 추락하는(설리의 악몽) 오프닝 크레딧 화면이 말해주듯 이 영화는 9ㆍ11 이후를 사는 미국인들을 향한 깊은 위무의 시선을 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감독은 질주하는 세상의 시스템 아래에서 갈수록 왜소해지고 납작해지는, 더 자주는 서로에게 의심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그래도 여전히 소진되지 않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는 듯하며, 어쩌면 낡았을 그 믿음을 그날 허드슨 강의 사람들에게서 끌어내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그 믿음은 흔들리고 회의하는 믿음이며, 성찰하고 완보하는 영화의 리듬에 실려 다시 우리를 흔든다. 영화는 그냥 하나의 전체로, 이음새를 의식할 수 없는(사고 순간으로 돌아가는 플래시백도 이 영화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재와 하나다) 강물 같은 흐름으로 묵직하게 우리를 향해 밀고 들어오는데 그 감흥을 설명할 말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허드슨 강변을 헉헉대며 달리는 설리의 늙은 육신과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조종석의 손 등 어느 장면에서든 군더더기 없이 그 핵심에서 인간의 현존과 이야기를 느끼게 만드는 그의 화면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그렇긴 해도 이 자리에서는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울컥 치솟았던 울음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기장은 비상 착수를 결정한 뒤 ‘충돌에 대비하라’는 기내 방송을 내보낸다. 세 명의 여승무원은 공포에 질린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침착하게 비상 매뉴얼을 가동한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라”는 승무원들의 단호한 구호가 반복된다. 이 구호는 나중에 국가운수안전위의 공청회 자리에서 조종실 음성을 청취할 때 기장과 부기장의 긴박한 대화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기도 하는데, 이 순간 나는 거의 아무런 비상 매뉴얼도 작동하지 않았던 세월호의 시간이 내 몸을 향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강 위로의 착수 후 날개 쪽 양 문을 열고 비행기 밖으로의 탈출을 인도하는 기장과 승무원들, 물이 차오르는 객실 안에서 마지막 한 명의 승객까지 확인하는 기장. 허드슨 강의 통근 배들과 구조대의 헬기가 불시착한 비행기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의 감동을 나는 온전히 받아 안을 수 없었다. 155명 전원이 구조되는 데 걸린 시간은 24분이었다. 결국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다. 어떤 영화는 그 궁극적 향유와 소유에서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오지 못한다. 그 구조의 순간을 보며 흘린 눈물은 쓰라리고 서러웠다. 그것이 기적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155명은 결코 숫자가 아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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