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0월 6일
1976년 10월 6일 장칭과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 등 이른바 중국 문화대혁명의 권력자 4인방이 체포됐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9월 9일)한 지 약 한 달 만이었고, 장칭은 마오의 아내이자 4인방의 우두머리였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로스 테릴은 평전 ‘장칭(江靑)’(교양인, 양현수 옮김)에서 “중국에서는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이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경우, 그 여성이 권력을 잡는 데 성적 매력을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장칭이 휘둘렀던 권력은 한 번도 장칭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손에 넣은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썼다. ‘정치적 마녀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책은 한 가난한 목수의 딸(여성)이 배우가 되고 혁명 전사가 되고 당 주석의 아내이자 정치인이 돼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과정, 또 마오 사후 스스로 ‘측천무후’가 되려다 좌절하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다. “수멍(장칭의 본명)이 맞닥뜨린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첩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더 심각한 두 번째 문제”였다. 저자는 첩의 어린 딸이 제 손으로 전족(남성에 얽매인 여성의 상징)을 벗어 던지고 노동하는 여성이 되기로 결심한 뒤 사형수로 옥에 갇히기까지 겪는 중국 봉건-사회주의 체제의 실상을 함께 기술했다.
중국 언론은 숙청된 장칭에게 ‘백골정(白骨精)’, 즉 삼장법사를 현혹한 서유기의 요괴라는 별명을 달아 조롱했다. 장칭은, 재판정에서 없는 죄까지 인정하며 관용을 호소하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마치 마지막 공연을 펼치는 배우처럼 의연했다. “진실이라든가 감정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몸을 낮추고 비굴하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의 죄를 묻는 것은 문혁에 대한 복수이자 마오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어설픈 시도’일 뿐, 권력자들 즉 화궈펑과 덩샤오핑 무엇보다 마오를 단죄하는 것임을, 법정에 선 건 자신이 아니라 마오 체제의 공산주의라는 사실을 그는 주장했다. 장칭의 전남편 탕나는 “장칭은 마오를 사랑했”고 “그래서 절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장칭은 91년 5월 1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가는 “장칭은 (도덕적 심판을 떠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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