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강아지를 키우자고 말했을 때 처음엔 반대했다. 마음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래전 키우던 시추 ‘꽐라’가 죽었을 때 너무 슬퍼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들에게만은 그런 아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외동이라 외로워 동생 같은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청에 결국 포메라니안을 입양하게 됐다. 지금 함께 사는 귀여운 ‘라떼’다.
라떼를 키우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됐다. 소통은 언어를 넘어선 존재들의 교감이라는 게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게 애착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애착이란 특별한 인물과 형성하는 친밀한 정서적 유대를 말한다. 애착을 인간 본성으로 파악한 이는 심리학자 존 볼비다. 그는 어머니와 아기를 서로가 애착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존재로 봤다. 그리고 이 애착이 실패하면 아이의 발달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가 버릇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신뢰가 높다는 점을 돌아볼 때 애착은 삶의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 애착이 차고 넘친다는 점이다. 애착의 포괄적인 의미가 떨어지기 싫어하는 감정적 친밀성에 있다면, 그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동물이나 식물, 옷이나 가방, 술이나 자동차일 수도 있고, 각종 취미 활동들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애착을 갖는 이들을 ‘마니아’ 또는 ‘덕후’라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두 가지 대상에 열광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주말마다 전국 산을 오르거나 유명 평양냉면집을 순례하거나 일본 애니 피겨를 사 모으는 마니아와 덕후가 바로 그들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나 홀로 시대’ 또는 ‘불안의 시대’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에 더해 나는 ‘애착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애착이 범람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무엇이 이런 애착 열풍을 낳은 걸까.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살기 바빠 애착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가고 쏠리는 경향이 증가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선 어떤 일을 하느냐의 직업보다 자신의 욕망과 기호를 충족시키는 취미 활동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애착의 마음은 고독의 마음과 정확히 짝을 이룬다. 나 홀로 사는 것은 자유와 고독을 동시에 선사한다. 고독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없다는 불안을 안겨준다. 게다가 대학 입시, 청년 실업, 구조조정, 노후 대비 등의 힘겨운 사회 현실은 그 불안을 증폭시킨다. 고독과 불안이라는 실존적 상황에서 잠시라도 마음을 둘만 한 대상을 찾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애착의 상대에는 순수한 기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애착의 순간에는 짧지만 강렬한 위로가 있다. 그래서 애착하는 존재에 대해선 누구나 선하고 따듯한,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애착의 시대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갖게 한다. 애착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애착은 삶의 에너지다.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한 것보다는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것은 삶에 활력을 준다. 그러나 애착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불안하고 세상이 황량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불안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애착하지 않으면 불안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게 애착의 시대가 갖는 그늘이 아닐까.
애착이 한 걸음 나아가면 집착이 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라이너 파스빈더 감독이 만든 영화다. 불안은 스스로의 해소를 위해 집착을 키운다. 집착은 사랑을 잠식한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애착이 진짜 사랑이지 않을까. 새로운 가족인 라떼가 내게 선물한 깨달음이다.
박상희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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