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사회에서 널리 쓰인다. ‘안전’ ‘공정’ ‘격차사회 극복’ ‘협력’ 등의 키워드들이 언론에도 종종 오르내린다. 시대정신(zeitgeist)의 어원을 만든 헤르더, 헤겔이 본래 의미했던 그 개념은 무엇보다 인간 정신의 완성을 지향한다.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 정치적, 사회적 동향이 어떤 인간 정신, 혹은 인간상을 지향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한편 ‘창조경제’라는 말이 현 정부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열 키워드로 각광을 받았고, 나 역시 수년 전 그 단어에 정책적 의미를 부여하고 전략을 수립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벤처생태계의 발전을 포함한 혁신을 위해 한국의 행위자들이 어떤 자질이 가장 부족한지를 주로 공학 분야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결과는 예상했던 바와 다소 달랐다. 으레 ‘창의성’이 가장 부족하다고 답할 줄 알았는데 막상 서베이 결과를 보니 한국 사람들은 창의성보다도 ‘도전정신’과 ‘리더십’이 가장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오늘날 과학이나 공학의 영역에서 한 사람의 천재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창안해서 지식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응용이 일어나고, 산업과 사회에서 혁신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여러 종류의 회의적인 견해를 극복하고 유의미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수없이 도전하고, 여러 이질적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협업했을 때 혁신이 일어난다. 그 도전과 협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리더의 역량, 즉 리더십이다.
아무도 가지 못한 곳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하고 협력하려면, 동료를 믿어야 한다. 리더는 동료를 믿을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하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도덕적인 감화력을 발휘하고,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런 자질이 수많은 크고 작은 리더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뿌리내릴 때, 우리는 온전한 사회의 나아감을 믿을 수 있다.
지난 수년간 이 나라의 상황을 지켜보며, 역시나 사람들 사이에 기본적인 리더십이 가장 부족함을 확인한다. 그 슬픈 깨달음은, 구구절절한 글로 쓰기에는 너무 버겁다. 그래서 어쭙잖은 시로 대신한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을 쉽게 쓰기 이전에, 우리는 그런 리더로서의 인간을 지향할 수 있을까.
리더십이 없으면 빨리 망하게 해주세요 / 사월도 지나서 또 시월인데
수상한 이곳에선 리더들은 넘쳐나고 / 언론 기사들에는 간드러진 그 말이 / 대통령, 장관, 기관장, 회장, 사장, 총장에게 따라붙는데 / 어떤 자질이 있거나 필요한지는 언제나 오리무중
거룩한 그분처럼 비속한 그 말처럼 / 꾸미되 설명하지 않는 단어들의 병렬은 / 체념한 벙어리들의 엎드린 종교의례
리더십이 없으면 빨리 망하게 해주세요 / 사월도 지나서 또 시월인데
적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정치를 못 하는 정치인과 / 국과장의 즉흥적인 발상이 없으면 행정을 못 하는 기관장과 / 과차장의 피 말리는 야근이 없으면 사업을 못 하는 경영자와 / 대학원생의 탐구 없는 노동이 없으면 논문을 못 내는 교수 앞에 / 리더십은 감히 설명해선 안 될 터부일 테니
강팍한 패거리들이 민주주의를 이끌고 / 두 얼굴의 마름들이 자본주의를 이끌면 / 아, 이곳은 재빨리 가슴과 머리를 도려낸 / 즐거운 벙어리들의 분주한 지상낙원
리더십이 없으면 빨리 망하게 해주세요 / 사월도 지나서 또 시월인데
행여나 빨리 망하거든 / 은혜로운 그때는 / 백마 탄 초인도, 갓난아기의 돌반지도 / 바라지 말아줘요
생존본능과 욕망의 하수구에 내버린 / 가슴과 머리를 되찾아 / 철 지난 아집 말고 / 개념만 탑재해요
서서히 망하면 / 죽지 않을 만큼만 살면서 / 나는 미생, 남들은 좀비라 말하고 / 착하고 의로운 사람을 찾는다는 말만큼은 / 제발 부디 숨죽여 입 막아 주세요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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