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0월 4일
미국 사우스다코다 주 블랙힐스 산군의 러시모어산 화강암 벼랑에서 1927년 10월 4일 작업이 시작했다. 다이너마이트로 자리를 잡고, 드릴과 해머로 거친 윤곽을 만든 뒤 끌과 정으로 선을 찾아가는 작업. 울퉁불퉁한 사면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독립선언의 초안을 쓴 2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 조각으로 마무리된 것은 14년 뒤인 1941년 10월 31일이었다.
대평원을 가른 미주리강 중부의 동쪽 아이오와와 미네소타 등이 비옥한 곡창지대인 반면 서부 사우스다코다 주 초원은 목축 외엔 이렇다 할 소득원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돌 산은 널려 있으니 그 봉우리들을, 마담 투소의 박물관처럼 서부의 인물들로 조각해놓으면 관광객이 모이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건 한 향토사학자였다. 탐험가 루이스와 클라크, 원주민 라코다족 지도자 레드 클라우드(마흐피야 루타) 등. 당시 주지사가 거기 동조했다.
모델을 대통령들로 바꾼 건 작업 책임을 맡은 조각가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 1867~1941)이었다. 그는 러시모어와 그의 작업이 이야기 동산이 아닌 미국의 상징이 되길 원했다. 암질 탐사를 거쳐 햇살 받는 동남쪽 능선의 지금 자리를 정한 것도 그였다. 그는 그 일에 생애를 바쳤고, 부족한 예산을 연방 정부가 지원했다. 환경론자들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러시모어 조각은 미국의 상징이 됐고, 한 해 평균 2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러시모어 조각이 내도록 빛나는 것은, 그들 대통령의 업적과 별개로, 그것이 주민들의 삶과 연계된 자발적 산물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옛 공산국가들이나 지금 한국의 정치인 행정가들이 충성 경쟁하듯 세우는 독재자 동상과 달리 러시모어의 동상에는 어떤 정치적 이해도, 누군가의 우상화도, 차기 선거를 위한 포석도 아니었다. 또 그래서 ‘임기 내’ 같은 공기(工期)의 제한도 없었을 것이다. 보글럼 등은 자연 암벽에 대한 책임과 도리를 다하듯 작업에 임했고, 예산 지원법안에 서명한 대통령들도 자신의 얼굴을 넣으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삿됨이 없었기에 인근에 라코타의 전사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도 허용, 역사 부채 일부나마 갚고자 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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