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병국’을 아시나요? 귀에 그리 익지 않은 이름입니다. 712만 관객을 동원한 여름 흥행작 ‘터널’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주유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넣는데 아르바이트하는 한 노인이 실수로 주문 이상으로 주유를 합니다. 정수가 당황해 하는 사이 노인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정수에게 사과했던 주유소 사장 얼굴을 떠올리면 ‘아, 그 사람’ 하실 겁니다. 종종 본 단역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면 영화를 꽤 보신 분, 배우 아닌 감독이라고 알고 있다면 영화광이라 자부해도 좋습니다.
황병국 감독은 정우성 황정민 곽도원 등이 주연한 최신 영화 ‘아수라’에도 얼굴을 비칩니다. 비리 형사 한도경(정우성)이 얽힌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국 형사로 등장합니다. 귀에 쏙 박히는 대사는 없고 출연 시간도 짧지만 매서운 눈빛이 인상적입니다. 본업은 감독인데 어느 전업 연기자 못지않은 신 스틸러로 충무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황 감독의 면모가 새삼 눈길을 잡습니다.
‘아수라’는 황 감독에게 특별한 영화입니다. 자신의 ‘배우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성수 감독과 촬영 현장에서 다시 조우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황 감독은 일본영화학교 영화학과를 졸업한 유학파 감독 지망생이었습니다. 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태양은 없다’(1999)의 연출부원으로 일하며 충무로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임창정 주연의 ‘행복한 장의사’(2000)에서 폭력배로 잠깐 출연했던 황 감독은 김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무사’(2001)에서 인상적인 단역을 만나게 됩니다. 고려 무사 여솔(정우성)이 던진 창이 이마에 꽂혀 죽는 몽골 병사 역할이었습니다. 잔인하기도 했으나 여솔이 펼치는 호쾌한 액션의 결과라 관객들 기억에 깊게 각인된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제작진에 따르면 몽골 병사를 맡을 만한 배우가 없었습니다. 모든 촬영이 중국에서 이뤄져 단역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위험천만한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마에 화약을 붙여 터뜨린 뒤 컴퓨터그래픽(CG)으로 처리해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김 감독은 고민 끝에 스태프 중 역할을 자원하는 사람에게 촬영 뒤 하루 휴식을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오랜 로케이션으로 지칠 대로 지친 스태프 입장에선 귀가 솔깃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연출부원이던 황 감독이 손을 들었고, ‘무사’의 명장면 중 하나가 완성됐습니다. 황 감독은 이마의 화약이 폭발한 뒤 기절을 했고, 충격으로 하루를 쉬었다고 전해집니다.
황 감독은 ‘나의 결혼 원정기’(2005)로 감독 데뷔식을 치렀습니다. 정재형과 수애를 주연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촬영한 영화입니다. 결혼적령기를 한참 넘긴 농촌 총각이 신붓감을 찾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사랑을 그려냈습니다. 웃음 섞인 따스한 정서로 호평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2011년엔 엄태웅과 주원이 주연한 형사물 ‘특수본’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타임리스’(2009)와 ‘해결사’(2010)에 출연하며 연기 생활을 이어가던 황 감독은 2011년 인생 작품 ‘부당거래’를 만납니다. 경찰 수뇌부의 음모로 연쇄살인범으로 둔갑한 한 잡범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국선변호인 역할이었습니다. 자신의 무고함을 애써 주장하는 용의자에게 국선변호인은 “나, 30만원 받아요. 내가 하루 30만원 받고 검찰에 종일 남아 있어야겠어요?”라며 신경질을 냅니다. 이준익 이경미 감독 등 카메오가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부당거래’에서 황 감독의 존재감이 두드러집니다. 지난 2월 970만 관객을 모은 ‘검사외전’에도 황 감독은 국선변호인으로 잠시 등장하는데 ‘부당거래’ 출연 당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부당거래’ 이후 그의 출연작 수는 크게 늘어납니다. 하정우 주연의 ‘의뢰인’(2011)에선 형사로 꽤 비중 있게 등장하고, ‘고령화가족’(2013)과 ‘플랜맨’(2014), ‘신촌좀비만화’(2014), ‘패션왕’(2014), ‘베테랑’(2015), ‘내부자들’(2015)에 잇달아 출연했습니다. 주로 일상에 찌들어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인물들을 연기했습니다. 서민적인 얼굴이 역설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900만 관객이 찾은 ‘내부자들’에서는 정치깡패이자 연예기획사 대표인 안상구(이병헌)의 눈치를 살피는 영화제작자로 출연해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본업은 감독인데 워낙 많은 영화들에 등장하다 보니 전업 연기자로 오해를 받을 만합니다.
황 감독은 김성수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았던 전작 ‘감기’(2013)에도 출연했습니다. 치명적인 호흡기질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격리작전에 나선 군인들에게 항의했다가 총을 보고 꼬리를 내리는 불량한 중년 남성 역할이었습니다. 사제지간인 김 감독과 황 감독의 끈끈한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충무로에선 영화 ‘아티스트 봉만대’(2013)와 ‘한강블루스’(2016)에서 주연을 맡은 봉만대 감독 등의 활약이 눈에 띄어 ‘감배’(감독 겸 배우를 줄인 말)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습니다. 황 감독은 또 어떤 영화로 관객들에게 발견의 즐거움을 줄까요? 물론 그의 새 연출작도 기다려집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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