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인간이다
영유아도 내ㆍ외적 자극 인지
죽음을 이해하고 애도 표현
선택권 지닌 개인으로 존중해
소아과의사 모리스 위젤(Morris Arthur Wessel)이 예일대 의대 인턴 시절 겪은 일이다. 각 과를 돌다가 소아과에 배치된 첫날 아침. 한 교수(Grover F, Powers, 1887~1968)가 위젤 등이 모여있던 방에 찾아와 조용히 따라오라더니 한 아이의 병실로 이끌고 가더란다. 수련의들은 특이증상이나 뭘 보여주겠거니 하며 기다렸지만, 교수는 잠시 머물다 아무 말없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닌가. 위젤은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당돌하게도” 왜 그냥 나오셨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교수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겁니다. 나로선 몇 분으로 느껴졌던 그 몇 초가 흐른 뒤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아이는 아침 식사 중이었어. 너는 내가 그의 식사라도 방해하길 바랐던 거야? 그래?’” 위젤은 저 일화를 이런저런 자리에서 들려주곤 했다. 예일대 5년 선배인 또 다른 의사(Roswell Gallagher)에게 그 일을 말했더니 그가 웃으며 자기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파워스 교수가 소아과 의사의 마음가짐을 가르치려고 늘 써먹는 ‘수법’이라고 말하더라는 후일담도 함께.
위젤이 찰스 앤더슨 앨드리치(Charles Anderson Aldrich)의 책 ‘아이도 인간이다: 아동 성장과 낡은 수유법에 대한 한 해석’을 읽은 건 임상 수련 전 기초과학을 공부하는 2년 과정 중 일이었다.(WP, 2016.9.6) 미네소타의대 교수 앨드리치(1888~1949)는 아동 행동발달에 관한 미국 최초의 의대연구소인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설립한 학자. 아동 질병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의사도 영ㆍ유아와 청소년의 일상적 심리와 행동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소아과병동 아동행동연구소 설립의 바탕에 깔려 있었다. 위젤은 파워스 교수의 저 일과 앨드리치의 철학에 감명 받아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숱한 우연과 행운이 겹쳐 그는 소아과의사가 됐고, 51년 예일대가 있는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 하워드 애비뉴의 가난한 동네에 작은 개인 병원을 열었다. 그리고 1993년 은퇴하기까지 42년 동안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니까 위젤은 인구 10만 명 남짓의 작은 대학 도시 변두리 개업의였다.
1993년 7월, 75세의 그가 은퇴하던 날, 이제는 성인이 된 그의 옛 환자들과 친구 등 600여 명이 뉴헤이븐 에드거튼 공원(Edgerton Park)에서 성대한 고별 행사를 마련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펀드를 설립했고, 지역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이름 없는 개인과 단체에게 주는 ‘위젤 상(Wessel Prize)’이라는 작은 상까지 제정했다.(NYT, 1993.7.25)
물론 위젤이 진료만 한 건 아니었다. 임상의(MD)로서 예일대 의대팀과 몇 차례 공동연구를 진행해 소아의학적 성취를 거두었고, 책을 쓰기도 했고, 약 35년간 발달장애아 복지센터 컨설턴트로도 일했고, 각급 학교에서 보건교육을 하기도 했고, 입양센터에서도 봉사활동을 했다. 그의 아내 이름가르드 위젤(Irmgard Wessel, 1925~2014)도 유명한 지역 봉사활동가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저 애정은 ‘의사’ 위젤에 대한 감사와 기림이었다. 예일대 의대 동창회보가 “아이들뿐 아니라 온 가족을 돌본 소아과 의사”라고 소개한 모리스 아서 위젤이 8월 20일 별세했다. 향년 98세.
-환자의 확대가족 자처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환자가족 옆에 있다는 건 중요
진료 외적으로도 유대 쌓아
그는 여러모로 ‘극성스러운’ 의사였다. 환자 전화가 걸려오면 한밤중에도 왕진을 가거나 병원에 나왔고, 우범지역이라 무서울 땐 개를 데리고 왕진을 다녔다. 진료 후 한 시간쯤 뒤엔 어김없이 환자 집에 전화를 걸어 상태를 묻고 조언하며 환자ㆍ가족을 안심시켰다. 가난한 이들은 진료비 대신 파이를 구워오기도 했다. 그는 환자를 차별하는 법이 없었고, 진료와 관련이 있든 없든 상의할 일이 있으면 언제건 연락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의사인 자신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이상 증상도 어린 환자나 환자 가족, 특히 갓 부모가 된 젊은 부모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는 걸 그는 알았고, 도움을 청하기 전에 먼저 도움을 주고자 했다. 2005년 미국소아과학회 소아과 역사센터 구술사 연구프로젝트 인터뷰에서 그는 “나처럼 일하면 전화 통화 때문에 환자를 못 본다고 조언하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그들보다 내가 훨씬 전화를 적게 받는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고 말했다. (왕진 에피소드 17쪽)
물론 작은 동네라 가능한 일이었다. 환자 아이들의 특별한 날, 예컨대 대학 입학식 즈음에는 격려 편지나 축하 카드를 쓰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확대 가족’이고자 했다. “서로 잘 알고 또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매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소아과의사는 사소한 질병이나 부상을 봐야 할 때가 많고, 그건 그들 가족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기회가 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소아과 의사들이 많다.”(NYT, 위 기사)
그는 아이들, 심지어 갓 태어난 영ㆍ유아들도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안다고, 예컨대 부모가 다른 집안 문제로 고민하는 것들까지 느끼며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인성과 가치관 나아가 육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또 그는 아이가 10대 중반쯤 되면 부모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만간 넌 의사를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모른다. 난 그 마음 이해하고, 원하면 좋은 의사를 소개해줄 테니 말해다오.(…) 환자와 의사로서 우리가 나누는 말들은 이제 비밀이며, 만일 네게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그걸 네 부모님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도 함께 상의해야 해.” 이제 그들이 부모의 선택에 좌우되는 부속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권을 지닌 개인임을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알려주는, 환자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위젤은 1917년 11월 1일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났다. 코네티컷대에서 인류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던 아버지는 위젤이 태어난 지 11개월 만에 감염질환으로 숨졌다. 학교측 배려로 강사 자리를 물려받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연봉 2,500달러에 하던 일을 1,800달러에 하면서 거의 종일 학교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외동인 그는 젖먹이 때부터 뉴런던의 “일종의 호스피스 병동 같은” 복지시설에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다시피 했고, 홍역도 그를 살뜰히 보살펴 주던 한 가정의와 함께 치렀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나나 내 어머니에겐 무척 힘겨운 시절이었다. 유년의 나는 아주 외로웠다(…) 그 시절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지금 내가 만나는 가족들에게 주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 틀림없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39년 존스홉킨스의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대학원에 진학, 43년 M.D(임상의사 자격)를 받았다. 파워스나 앨드리치의 책, 훗날 그의 멘토가 되는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의 영향은 그러니까, 그가 품었던 저 소아과 의사의 욕망을 일깨운 계기라 해야 할 것이다.
부모처럼 교수나 학자가 되려던 그에게 존스홉킨스대 한 교수(Tracy Soneborn)가 어느 날 “모리스, 넌 연구실 일보다 연구실 사람들을 더 좋아하잖아. 넌 사교적인 사람이고 네 재능을 꽃피울 곳은 병원이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칭찬인지 뭔지 애매하지만, 그는 그 조언대로 PhD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 존스홉킨스 대신 예일대로 진학한 까닭에 대해 그는 “예일이 훨씬 덜 경쟁적이고 보다 격식을 안 따지는 분위기였다. 근래의 홉킨스가 어떤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요즘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소아과학회 인터뷰)
-의사로서 연구도 활발히
유대감이 정서에 미치는 영향
신생아의 발작적 울음 ‘콜릭’
아동 연구로 부모의 고통 덜어
하지만 병원 개업 전후로 그는 여러 차례 이런저런 연구에도 가담했다. 2차대전 군 복무를 마친 뒤인 48년 연구원 자격으로 예일대 아동정신과 에디트 잭슨(Edith Jackson) 교수팀과 함께 저 유명한 ‘모자 동실 Rooming-In’ 연구를 진행했다. 산모와 신생아를, 원할 경우 아버지까지 한 병실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이 정서나 가족 유대감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피는 연구였다. 50년대 초반에는, 역시 예일대 팀과 함께 ‘콜릭(Colic)’이라 불리는 신생아 배앓이 연구를 그가 주도했다. 생후 며칠간, 심하면 몇 달씩 이어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작적인 울음 증상. 영문을 몰라 아이 부모도 의사도 진땀을 흘리게 하는 그 증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그는 약 3년간 98명의 신생아를 살폈고, 환경이 달라진 데 따른 일종의 과민신체반응(알러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위젤은 54년 미국 소아과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콜릭 진단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외상 등 뚜렷한 이유 없이 신생아가 하루 3시간 이상, 매주 사흘 이상 울고, 그 과정이 3주 이상 지속되면 ‘콜릭’으로 진단할 수 있다는 제안. ‘콜릭’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그의 진단 기준은 일부 수정된 형태로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예일대 소아과 시드니 스피젤(Sydney Spiesel) 교수는 “그의 진단 룰이 없었다면 숱한 이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위젤은 아이들의 울음 자체가 스스로를 치료하는 한 과정이라는 점을 표준과 통계를 통해 알게 함으로써 부모들의 심적 고통을 덜어주었다”(WP, 위 기사)고 말했다.
70년대에는 앤서니 도민스키라는 연구자와 함께 당시 미국의 아동 체내 납 성분 허용 기준치가 터무니 없이 높다며 대폭 낮출 것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발표, 이후 미국 소아과학회로 하여금 그들이 제시한 기준보다 더 낮은 기준을 정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예일대 간호대학장을 지낸 플로렌스 월드(Florence S. Wald)를 도와 코네티컷 주 브랜포드에 미국 최초의 호스피스시설을 공동 설립한 건 1974년이었다.(yalemadicine.yale.edu, 2005년 가을호) 월드가 허다한 의사들을 제쳐두고 뜬금없이 소아과 의사인 위젤에게 도움을 청한 까닭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위젤은 가족의 죽음을 포함한 여러 상실의 고통, 특히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무척 염려하곤 했다.
1997년 아동 행동의학에 공을 세운 의사에게 주는 앨드리치상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이듬해 가을 시상식 수상연설에서 35년 전 한 초등학교에서 보건교사(봉사활동의 일환이었던 듯하다)로 일하며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1학년 담임 교사가 학교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졌고, 교장이 그에게 아이들을 보살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당장 병원에 찾아가 선생님을 만나야겠다며 와글와글 요구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지 못해 진땀을 흘리던 그를 구원한 건 그 학급의 한 아이였다. “지난 주에 내 개가 차에 치였고, 난 길가에 누워있는 개를 발견했어. 내 개는 뻣뻣하게 굳었고 차가웠어. 내가 톡톡 두드렸지만 개는 내가 곁에 있는 것도 몰랐어. 선생님도 아마 그러실거야.” 아이가 이해한 죽음의 진실은 정확했고, 그 덕에 아이들은 진정됐다고 한다. 그는 칠판에 각자가 생각하는 선생님과의 좋은 기억들을 적게 했고, 그걸 나중에 옮겨 적어 유족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상실과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newhavenindependant.org, 16.8.20) 그는, 어른들은 온갖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모와 격려의 말들을 듣곤 하지만 아이들은 뭘 알겠냐며 다만 측은히 바라보거나 껴안아줄 뿐 진실로부터 소외시키곤 한다고, 그건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소아과의사들처럼, 나는 어떤 영ㆍ유아들은 ‘고도의 직관(highly perceptive)’이 있고, 대다수가 내적ㆍ외적 자극을 강렬하게 인지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또 그 사실이 아이를 잘 보살피려다 실패하곤 하는 부모들의 좌절감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가 고발한 미국의 매정한 의료시스템 안에서, 특히 뉴헤이븐의 가난한 부모들에게 위젤은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위젤은 앨드리치 상 수상소감 맨 끝에 이렇게 말했다. “관리의료(국민의료보험 없는 부실한 공공의료체계와 보험료에 맞춰 정해진 의료서비스만 제공하는 민간의료보험 체계의 통칭)체제 하에서 수많은 의사들이 속상해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를 소아과 의사가 되게 한 바로 그 동기가 현재 맞닥뜨린 도전에서 우리를 지지 않게 하리라 믿는다.” 전국민건강보험 가입을 골자로 한 미국 의료보험시스템 개혁법안(PPACA, 이른바 오바마케어)이 진통 끝에 의회 승인을 얻어 시행된 건 2014년 1월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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