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의 탄생
이언 모리스 지음ㆍ이재경 옮김
반니 발행ㆍ2만2,000원
이럴 줄 알았다. 49쪽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그림이 나온다. 두 정치학자가 2010년 세계가치관 조사를 토대로 만든 ‘문화지도’다. 세로축을 세속주의, 가로축을 개인주의 잣대로 분석해 세계 각 나라들을 배치한 것인데, 묘하게도 각 문화권에 따라 일정 정도 범주화가 이뤄졌다.
더 재밌는 건 여기서 한국을 찾아보면 일본과 유교문화권에 묶어 두긴 했는데, 좌표상 배치를 보면 러시아 근방이다. 사실상 동방정교권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그런데 동방정교권 곁에 있는 이슬람문화권과 비교해보면 동방정교권은 이슬람문화권에 비해 조금 더 세속적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는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 문화가 세계적으로는 어느 지점인지 명백히 드러내준다. 쉽게 말해 함부로 푸틴을 독재자라 비판하고 그런 사람 왜 뽑아주냐고 러시아 사람 욕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 얼굴에 침뱉기일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우리 가치, 우리 문화 소중하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물어보자. 그 가치, 문화라는 것이 시대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면? 긴 눈으로 봐서 상대적일 뿐이라면?
고고학자 이언 모리스의 ‘가치관의 탄생’은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모리스는 자신의 작업을 “윤리를 철학의 품에서 떼어내 생물학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라 일컫는다. 가치관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했는지 인류 역사를 더듬어 가며 거시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저자가 이언 모리스라 하지만, 실은 논쟁집이다. 2012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모리스가 인간 가치관에 대해 강연을 진행했고, 이 강연에 대해 4명의 논평자가 각자 비판을 제기했고, 마지막에는 그 비판들에 대한 모리스의 답변이 붙어 있다. 일단 부러운 건, 논쟁의 수사학이다. 5명의 참가자 모두 은근히 상대를 깔아뭉개면서 자기 논지의 정당함을 얘기하는데, 그 노련한 수사학이 고급지면서도 은근히 웃긴다. 특히 마지막 답변에서 모리스는 “내가 틀렸다는 그들의 말이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내가 옳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시켰다는 자신은 없다”고 해놓고는 정작 그 장의 제목은 ‘나의 견해는 언제나 옳다’라고 붙였다.
모리스의 주장은 일단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을 전제로 깐다. 윌슨은 인류 진화가 “모닥불 주변에 둘러 앉는 행위”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생존을 위한 사회성이 필요해지면서 동료들과의 신뢰 관계 형성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덕적 능력인 공감, 공평, 정의 같은 것들이 형성됐다. 진화는 유전자뿐 아니라 사회와도 관계를 맺는 다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모리스는 그 다음 단계, 그러니까 이런 기본적인 도덕적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했느냐를 따라간다. 단계는 세가지다. 개체의 생존, 집단의 번성을 가능케 하려면 에너지를 획득해야 하는데, 먹을거리까지 포함해 생존에 필요한 전체 에너지 획득 방식이 수렵채집에서 농업에서 화석연료로 넘어가면서 도덕도 그에 맞춰 진화했다고 본다.
수렵채집사회는 평등하지만 폭력성이 강하다. “최소 구성원으로 끊임없이 방랑하는 집단은 정치적 경제적 성별 위계를 가파르게 형성하고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원시사회를 인류사의 낙원으로 치장해대는 낭만적 유행도 간혹 반복되는데, 모리스는 이 낭만주의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구성원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잔혹한 폭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농경사회는 평화와 위계화를 발달시킨다. 사실 농업이 좋은 선택은 아니다. 많은 고고학 자료들은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뒤 인류의 신체조건이나 영양상태가 오히려 악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농경사회의 도래를 두고 ‘총 균 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사 최악의 실수”,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 부를 정도다. 그럼에도 불어난 집단을 더 번성시킬 수 있는 방법은 농경이 유일했다. 대신 가혹한 농업노동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지배자와 피지배자 이항 대립이 극한으로 발달된 시기다. 왕과 노예, 남자와 여자 같은 대립항들은 여기서 나온다. 대신 지속적 생산을 위해 수렵채집사회보다 ‘평화’의 가치가 드높아진다.
이 평화 때문에 농업사회에 대해서도 낭만적인 신화가 덧입혀진다. ‘평화로운 공동체’였다는 그리움 말이다. 그러나 강력한 위계화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다. 모리스는 농업사회에 대해 “음모, 앙갚음, 탐욕, 부정행위, 비열한 술책의 온상”이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말라 지적한다. 농업이나 공동체에 대한 신화가 강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다음 화석연료 시대는 바로 이 위계가 무너지는 시대다. 그 대신 들어서는 건 ‘상호대체 가능한 시민들의 열린 공동체’라는 가치다. “모두를 최대한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 공정하고 공평하다는 생각이 대체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주장은 묘한 냄새를 풍긴다. 가치의 상대주의는 결국 도덕적 단죄를 무뎌지게 하고,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오랜 의심 말이다. 가령 모리스는 탈레반 같은 단체를 악마화하는데 반대한다. 모리스는 “농경사회였다면 돌출 행동이나 판단 미숙을 지적당할 수는 있어도 사악한 무리로 취급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농경사회란 “1만년 동안 신성 질서에 대한 모독을 폭력으로 저지하고 처벌”했던 사회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결여가 아니라 도덕의 후진성”이 문제라는 얘기다.
더구나 이런 주장은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인간 내면에 평등, 평화, 조화가 존재하기에 인간은 특출한 존재라는 오랜 믿음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시퍼드(문학), 조너선 스펜스(중국사), 크리스틴 코스가드(철학), 마거릿 애트우드(작가) 4명이 제기하는 다양한 비판이 겨냥하는 지점은 결국 인간의 자존심 문제다. 모리스의 대답은 이렇다. “보편적인 인간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역사를 통틀어 도덕철학자들이 한 것은 가장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가치관을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 내 이론은 특정 해석을 내세워 보편의 진리를 주장하는 모두를 싸잡아 비판한다.” 생물학적 진화론 못지 않게, 도덕의 진화론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 역시 ‘겸손’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고 너무 크게 외칠 필요 없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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