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원, 4개 조건 이례적 달아
‘참관 허용 등 유족 의사 반영하라’
법조계 “전례 없어… 효력 불명확”
경찰도 논란 계속되자 고민 커져
“내달 25일까지 유효… 설득 집중”
2. 유족은 반대 의사 확고
“경찰의 제안 받아들이기 어려워”
시민단체 등 부검시도 중단 요구
경고살수 없이 살포한 영상 나와
백남기씨 죽음 경찰 책임론 확산
시위 도중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은 뒤 지난 25일 숨진 농민 고 백남기(69)씨에 대해 법원이 28일 발부한 부검영장(압수수색검증영장)을 두고 비판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부검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결정을 번복한 꼴인 데다 분쟁해결 주체인 법원이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달아 오히려 논란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중앙지법은 백씨의 부검영장을 발부하면서 이례적으로 4가지 조건을 달았다. ▦부검장소는 유족 의사를 확인하고 원하면 서울대병원으로 변경할 것 ▦유족이 희망할 경우 유족 1,2명, 변호사 1명의 참관을 허용할 것 ▦부검절차 영상을 촬영할 것 ▦부검 실시 시기, 방법, 절차, 경과에 관해 유족 측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것 등이다.
법조계에서는 영장발부 사유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9일 “법원이 동영상이나 진료기록을 보고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할 정도로 합리적 의심을 할 만한 부분이 있었느냐는 의문이 든다”며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시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다른 증거를 확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과도한 결정이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영장 집행을 허락하면서 조건을 다는 경우도 전례를 찾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한 재경지법 판사는 “이런 영장은 처음 본다”며 “장소와 시간을 정해주면서 확실한 제한을 둔 것도 아니고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면 경찰이나 유족 모두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영장 효력을 법리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이정렬 전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영장에 조건을 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며 “부검이 옳다면 영장을 발부하고 아니면 기각해야 하는데 조건을 붙임으로써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영장 집행을 앞둔 경찰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경찰은 일단 ‘유족과의 협의’가 부검 선결조건이라는 점에서 백씨 가족을 설득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이날 오후 “경찰과 부검 관련 협의를 진행할 대표자와 일시, 장소를 내달 4일까지 정해 통보해 달라”는 내용의 우편을 백남기투쟁본부 측에 발송했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유족 의사를 전적으로 반영해 부검 장소와 참관인 등을 정할 예정”이라며 “영장 유효기간이 내달 25일까지인 만큼 대화로 해결이 가능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과 투쟁본부 측 반대 의사가 워낙 확고해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유족 측 이정일 변호사는 “경찰 제안에 응할지 여부는 가족과 논의해 봐야겠지만 부검을 전제로 한 만남이기 때문에 섣불리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투쟁본부 관계자는 “검찰과 경찰, 법원이 합심해 가족한테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국가폭력의 실상을 덮으려는 꼼수”라고 비난했다.
백씨 죽음에 대한 경찰 책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이날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백씨의 부상 당시 동영상을 보면 경찰 살수차가 처음부터 시위대를 향해 직접 물을 살포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고살수 후 곡사 3회, 직사 2회를 했다”는 경찰 보고서와 배치되는 내용이다. 만약 경찰이 영장 집행 시한에 쫓겨 무리하게 부검을 실시할 경우 백씨 죽음의 도화선이 된 11월 민중총궐기대회를 앞두고 반정부 여론을 결집시키는 악수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법원의 영장발부 소식에 정부와 사법기관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확산되고 있다. 백씨 유족과 시민단체, 정치ㆍ종교ㆍ법조계 등 각계 인사 400여명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시국선언을 열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라며 정부의 사과 및 책임자 처벌, 부검시도 중단을 요구했다.
김성환 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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