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라 노렌자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이집트 호루스의 눈. 고대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초월적 감시자로서의 신에게서 눈이 특히 강조된다는 점이다. 김영사 제공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음ㆍ홍지수 옮김
김영사 발행ㆍ424쪽ㆍ1만8,000원

전투적 무신론자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김영사)에서 유신론을 공략하는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구약이다. 신약의 신은 그래도 인간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의 원칙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다. 반면 구약의 신은 ‘너희들이 감히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며 질투하고 벌을 내리고 복수하고 살해하는가 하면, ‘나에 대한 존경을 증명해보라’며 온갖 희한한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다.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십자가 재현 행사. 자원자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매달린다. 요즘에야 굳이 왜 저럴까 싶지만, 과도한 신앙심의 표출은 사회의 결속력을 높이는 기능을 수행한다. 김영사 제공

미안하지만, 구약을 읽다 보면 신이란 결국 애정결핍증에 시달리는 스토커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도킨스는 이런 수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그리고 어릴 적부터 구약을 읽은 이스라엘 어린이들에 대한 심리학 연구결과 같은 걸 인용해가며 이제 아이들에게 구약을 읽히는 짓 따윈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종교란 ‘아편’ 이전에 ‘아동학대’란 얘기다.

갑론을박이 뒤따른다. 구약시대 세계상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라는 역사학적 반론, 신의 두 얼굴인 구약과 신약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신학적 반론 같은 건 잠시 밀쳐두자. 가장 많은 말을 낳은 부분은 신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지옥에 대한 공포가 도덕적으로 사는데 도움이 된다는 구약 옹호론이다. ‘나 잘난’ 근대인들이 이 따위 주장을 가만 둘 리 없다. 도덕은 자신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이, 지옥이 무서워 벌벌 떨면서 억지로 지키는 도덕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이 부분을 풀어내는 책이다. 저자 아라 노렌자얀(45)의 주장을 압축하자면, 종교는 협력하는 인간집단을 거대화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좀 학구적인 말투를 쓰자면 종교란 “익명의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좋은 평판이나 호혜성을 유지할 유인책이 불충분한 대규모 집단 내에서 협력의 수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는 기능을 한다. 대중적인 말투로 고치자면 종교는 딴 마음 품으려는 이들에게 ‘난 니가 어젯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심리학 용어론 일종의 점화효과론이다.

인류가 소규모 집단이었을 때 보상과 처벌은 집단 내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서로가 다 아는 사이니까 가능하다. 집단 규모가 불어나면 이게 어려워진다. 사람들이 알아서 양심껏 행동하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동화에서나 있다. 슬쩍 숟가락 올리거나, 돌아서서 배반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 때 등장한 게 ‘초자연적 감시자’다. 사회를 배신하는 이들을 제어할 수단이다. ‘난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모든 종교엔 ‘눈’의 이미지가 강조되어 있다. “단순히 도덕적인 감정만으로 거대한 협력사회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이 때 “초자연적 감시자의 눈길,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두려움, 영원한 저주, 지옥, 업보, 운명” 같은 것들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신과 지옥 관념의 순기능은 하나 더 있다. 보복의 악순환도 막아준다.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에게 종교는 “괜찮아, 저 놈은 천벌 받을 거야”라고 속삭여준다.

나쁜 사람이 평생 고통 받는다는 지옥불 이미지는 요즘 조롱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란 노렌자얀은 사회의 결속력을 드높이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평가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사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이 초자연적 감시자는 점점 더 거대한 신으로 진화해나간다. 실제 각 지역의 종교들을 분석해보면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인간의 행동을 직접 감시하고 보상하고 처벌을 내리는 신은 소규모 집단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흔하게 나타난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지금 지구상에 남아 있는 주요 종교들은, 어떻게 보자면 사회의 규모를 키워나가는 투쟁에서 다른 여러 경쟁 종교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종교들인 셈이다.

현대의 무신론은 이 같은 차원에서 이해된다. 무신론자들은 대개 “대규모 익명 집단사회에 거주하고, 시장경제활동에 참여하고, 낯선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규범을 내면화한” 이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딱히 종교가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종교 따위가, 종교가 강요한 도덕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오히려 ‘기괴한(Weird)’이란 딱지는 붙인다. 무신론은 서구화된(Western), 고학력의(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민주적 성향(Democratic) 사람들의 얘기라는 것이다. 전세계 인구를 놓고 봤을 때 그런 이들은 많아 봐야 10% 안팎이다. 아예 “인간의 두뇌구조상 종교는 무신론과 과학보다 인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까지 얘기한다. 무작정 종교를 쓸어내버릴 그 무엇으로 취급하지 말고, 지금 우리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자는 얘기다.

아라 노렌자얀. 최근 주목받고 있는 사회심리학자다.

‘종교는 사회적 필요성 때문에 탄생했다’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해서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각종 실험자료를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엄밀한 해석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저자의 조심스러운 접근법이다. 노렌자얀은 레바논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심리학자다. 김영사 관계자는 “최근 인류 문명의 시원과 관련한 논문들 가운데 가장 많이 소개되고 화제가 되고 있는 학자”라면서 “그 학자가 처음 내놓는 단독저서를 국내 독자들에게 그의 주장 전체를 소개한다는 뜻에서 출간했다”고 말했다. 종교기원 문제에 관심 있는 이들은 기존의 자연선택적 적응설, 부산물이론 등을 저자가 어떻게 비판해나가는지 살펴보는 묘미도 있다.

아무래도 저자는 사회의 응집력 유지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래서 그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냐’는 질문을 좋아하는 ‘무신론’ ‘좌파’들 입맛엔 더러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리 볼 이유는 없다. 거대한 신의 출현 비밀을 쫓고 쫓은 결과, 남는 질문은 결국 우리 이웃을 믿느냐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이 부처다 같은 일상 속 환대의 가르침이 괜히 종교에서 나온 게 아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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