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빌딩 화재 의인 故안치범씨
항상 남몰래 어려운 사람 도와
탈출하고도 되돌아가 이웃 구조
‘아빠는 바라는 거 딱 하나 정직하고 건강한 착한 아이 바른 아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안광명(62)씨는 화마가 앗아간 아들 치범(28)씨가 생전 불러준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중후한 저음이 멋들어졌던 아들이 몇년 전 노래방에서 불러줬던 가수 싸이의 ‘아버지’란 노래였다. 아버지는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융통성이 없다 싶을 정도로 바르고 착한 아들이었다. 결국 평소 성품대로 좋은 일을 하고 떠났다”고 말했다.
치범씨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우선인 아들이었다.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한 뒤 서울 마포구 한 고등학교에서 장애학생들을 돕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던 치범씨는 제대 후에도 학교를 찾아 장애학생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평소 말을 안 해서 전혀 몰랐다. 가을 수학여행 때도 장애학생들과 동행하기로 돼있었다는 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머니 정혜경(57)씨가 “네 몸부터 챙기라”고 하면 그는 “엄마 인생 그렇게 살면 안돼”라고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치범씨는 지난 9일 마포구 서교동에서 발생한 원룸빌딩 화재 당시 이웃 주민들을 구하려다 연기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됐다. 뇌사 상태로 사경을 헤매던 그는 화재 11일 만인 20일 새벽 끝내 숨을 거뒀다.
어이없는 화재였고 안타까운 희생이었다. 9일 새벽 4시쯤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에 분노한 한 20대 남성이 치범씨가 거주하던 5층 원룸빌딩에 불을 질렀다.
가장 먼저 탈출한 치범씨는 119에 신고한 뒤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고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두드리며 “나오세요”라고 크게 소리쳐 주민들을 깨웠다.
입주자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라 자칫하면 많은 희생자가 날 뻔 했지만 치범씨 덕분에 21개 원룸이 있는 이 건물에서 추가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안씨가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을 지극히 아꼈다고 입을 모았다. 치범씨의 지인 박근범(30)씨는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면 늦은 밤에도 택시를 타고 달려와 주곤 했다. 늘 주변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속 깊은 친구였다”고 돌아봤다. 치범씨는 2년 전부터 성우를 꿈꾸며 두 달 전 독립해 성우 아카데미 인근 원룸에서 방송사 성우 시험을 준비하다 변을 당했다. 그가 공부했던 성우 아카데미 양희문(49) 원장은 “치범이가 웃으면 강의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성우 꿈은 못 이뤘지만 그 큰 목소리로 사람들 목숨을 살린 것”이라며 추모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치범씨의 할머니(85)는 “처음에는 가족들 생각도 안하고 불길 속에 뛰어든 손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장하다’,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족들은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서울 마포구청에 의사자 신청을 할 예정이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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