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재래시장에 나가보니 갑자기 시장 아주머니들이 모두 같은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모든 아주머니의 머리 모양이 둥글둥글 양처럼 보여…’ 한국일보(8월 2일)에 실린 ‘한국은 유행의 나라’라는 글을 읽다 이 부분에서 빵 터졌다. 아마 내가 그 재래시장에 있었다면, 신이 나서 나도 파마를 하겠다고 미용실을 찾아 나섰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칼럼을 쓴 마틴 프로스트 씨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예술과 유행을 결연하게 나누는데, 예술과 유행의 거리는 사실 크지 않다. 미술의 역사에서 각종 유파를 나누는 것이 이미 유행을 전제한 것이고, 피카소의 그림이 공전의 히트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대의 유행이 있어 가능했다. 유행은 예술의 감정이입과 유사한데, 독일의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에 따르면 풍요로운 자연에서 사는 사람은 척박한 지역 사람보다 감정이입 능력이 더 크다. 그의 말대로라면, 시장 사람들의 놀라운 감정이입 능력은 넉넉한 자연 때문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인 이 땅에선 어느 날 내가 달이 되고 바람이 된다. 이런 감정이입을 유행이라 하든 예술이라 하든, 덕분에 우리 삶은 풍요로웠다. 온 마을 사람들의 머리가 둥글둥글 양머리가 됐다니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런데 실제는 주변 사람들이 다 양머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유행이 한국인 모두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이 유행의 나라라는 믿음의 이면에는 ‘한국인은 집단주의적’이라는 편견이 숨은 경우가 많다. 한국인은 ‘분위기’를 잘 타는데, 이를 집단주의로 오해하는 이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를 비슷한 의미의 ‘흥’으로 바꾸어 보면 오해는 쉽게 풀릴 수 있다. 흥은 집단적일 수도 개인적일 수도 있어서 한국인의 분위기를 집단주의로만 해석할 까닭이 없다. 물론 일본의 강제점령과 작금의 경제체제가 우리 심성을 왜곡시킨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집단주의는 우리보다 유럽인의 특징이었다. 그리스의 이데아에서 시작하여 중세의 유일 신앙과 근대의 절대이성을 거쳐 세계를 죽음의 잔치로 몰아넣은 제국주의와 그 끝에서 만난 2차 세계대전까지. 그들은 하나의 가치로 무장하길 좋아했다.
‘프랑스였다면 사람에 따라 머리 길이도 조금씩 다르고 파마의 강도도 조금씩 달랐을 것’이라는 표현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어쩌면 그에게 같아 보인 것은 파마가 아니라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도 백인은 모두 비슷해 보인다. 개성이 없다. 양의 얼굴을 구분하는 것만큼 어렵다. 그러나 그건 외국인에게 관심이 없고, 주의력도 부족한 내 탓이지 백인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프로스트 씨의 오해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명확해진다. 그에게 예술은 인식을 통한 차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예술은 훨씬 존재론적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살아온 유럽인의 내적 불안이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까에 천착하게 했다면, 우리는 달랐다.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는 크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5,000만 국민 중 고작 몇백 명 죽은 교통사고라는 반응이 인식론적이라면, 죽은 아이 하나하나가 내 아이 같은 존재여서 아프다는 반응이 존재론적 태도다. 애초 한국인의 예술은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 사건이 터지면 한국인은 논리를 내세우기보다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니 잭슨 폴록 그림에 대한 논쟁보다 마을 장터의 동글동글한 파마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헤겔은 예술이 과거보다 가치 없게 되었다며, 그 근거로 ‘예술을 사람이 직접 즐기기보다 학문의 대상으로 삼게’ 된 점을 들었다. 한국인에게 예술은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직접 향유하는, 펄펄 살아 있는 무엇이다. 한국인은 정말 예술적이다. 달빛이 흥건하다. 어디 가서 판소리나 푸지게 듣고 싶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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