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일 잘 못하면 패배자” 강요된 자기계발 논리를 깨다

입력
2016.09.19 04:40
0 0
일을 '잘'한다고 할 때, 그 '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스스로의 판단인가, 아니면 남들이 주입해둔 가치인가. 게티이미지뱅크
일을 '잘'한다고 할 때, 그 '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스스로의 판단인가, 아니면 남들이 주입해둔 가치인가. 게티이미지뱅크

‘잘한다ㆍ못한다’ 개념은 상대적

경쟁서 승리해 ‘일잘’ 돼도

패배 한번이면 ‘루저’ 전락

페북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 만여 명 모여 ‘일못’ 고백

‘자기계발↔경쟁’ 악순환 극복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일을 ‘잘’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그에 호응해 일을 잘하기 위한 노력에 나선다. 일을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자기계발의 논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힘을 얻고 진화해 나간다. 일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두 주체가 합의한 당연한 명제이고, 그에 따라 모든 개인은 스스로를 충실히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의 절대적 기준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잘/못은 경쟁을 통해 가려진다. 타인에게 승리하면 ‘잘’이 되고, 패배하면 ‘못’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타인을 주체로 둔 토너먼트 경쟁을 시작한다. 승리하면 다행이지만 패배하는 순간 언제든 ‘못’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에 따라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남들보다 더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한다.

다음 세대, 심화되는 경쟁

경쟁에서 한두 번 승리하는 것으로 일을 잘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매 순간이 경쟁의 연속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거기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보다 더 강한 상대와 싸워야 한다. 마치 한 국가나 기업의 성장률을 정해 두고 1%만 떨어져도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개인에게도 성장의 기대치가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 잘하면 내일은 더 잘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는 자기계발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로울 수 없다는 논리와 궤를 같이 해, 언제나 자기계발하는 개인만이 이 사회에서 ‘잘’이 될 자격을 부여 받는다.

경쟁에 참여하는 개인은 대개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기계발의 단계를 충실히 이행해 온 이들이다. 그래서 ‘잘’의 상대적 기준은 각각의 역량에 따라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이전 세대보다는 이후 세대들이 더 심한 경쟁에 내몰리곤 한다. 과거에 비해 외우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늘었다.

예컨대, 이번 올림픽이 끝나고 ‘기계제초 금메달리스트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되었다. 1932년의 금메달리스트는 구보하듯 달려와서 뜀틀의 먼 곳을 두 손으로 툭 대고는 그 반동으로 반대편에 엉거주춤 착지한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2012년의 금메달리스트 양학선은 전속력으로 달려와 뜀틀에 손을 댄 반동으로 높이 뛰어오른다. 그리고 몸을 비틀며 몇 바퀴를 돌고는 사뿐하게 착지한다. 1932년의 금메달리스트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시기의 가장 훌륭한 체조선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80년이 지나는 동안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기술은 차근차근 축적되고 진화했다. 아마도 다음 세대의 체조선수는 양학선보다 더 화려한 기술을 선보일 것이다.

굳이 80년의 시차를 두고 두 체조선수를 호출하지 않더라도, 불과 10년 전과 지금의 국가공무원 시험만 비교해도 그 차이가 명확하다. 그 난이도가 현저히 오른 것은 물론이고 고작 0.1점 차이로 당락이 갈린다. 경쟁률이 비정상으로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역량 높은 이들이 서로 경쟁한다. 사법시험만 해도 외워야 할 판례가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아우성이 늘 들린다.

모두가 산업역군일 수는 없다

우리 주변에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늘 드물다. 경쟁에서 패배하는 즉시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자기계발에 매진해 온 수많은 개인들은 깊은 허탈과 절망에 빠진다. ‘잉여’, ‘루저’, ‘패배자’ 이런 단어가 그들을 감싼다. 하지만 ‘일못’으로 규정될 수는 없기에 다시 자기계발에 탐닉하고, 그러한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이라는 커뮤니티도 만들었다. 일을 잘해야 한다는 그간의 틀을 깨는 전에 없던 시도였다. ‘거기에 누가 호응하겠어’ 하고 모두 생각했지만 그가 만든 페이스북 커뮤니티에는 만 명에 가까운 ‘일못’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이 얼마나 일을 못하는지 고백하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일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1프로가 아닌 99프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2015)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책은 일을 못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거의 유일한 자기계발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계발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기계발에 충실하며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이 ‘일못’들은 ‘잘’이라는 기준의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 둔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강요된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이만하면 됐다’ 하는 자기 기준을 두고 그에 따라 자기계발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해도 이들에게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일 잘하는 사람만 뽑아놔도 결국은 일 잘하는 사람과 일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일못’의 고백은 잘/못에만 함몰된 ‘일 잘’들이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다양한 페이스북 그룹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다양한 페이스북 그룹들.

사회/국가는 일 잘하고 있나

‘일못유’의 운영자 여정훈씨에 따르면 ‘일못’들의 생각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대체 얼마나 일을 못하나’ 하고 즐기러 온 이들도 있었고 ‘설마 정말 일을 못한다고 고백하려나’하고 반신반의한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못’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것은 그대로 일못유가 대항하고 있는 기존 자기계발의 논리다. 남들보다 일을 잘하는 것이 당연하며 만약 일을 못한다면 조롱의 대상이 되어도 좋다는, 혹은 그러한 선언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인 것이다.

모두가 만능 슈퍼맨이 되기 위해 부단히 경쟁하는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일까. 그래서 우리 사회,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일하고 있는가. 게티이미지뱅크
모두가 만능 슈퍼맨이 되기 위해 부단히 경쟁하는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일까. 그래서 우리 사회,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일하고 있는가.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그러한 편견을 이겨내며 일못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자신들의 일못하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내어 보이고 서로 나눈다. 그 구성원들마다 ‘일못’에 대한 감각과 정의는 서로 다양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일을 못하면 어떤가”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이들을 무책임하다고 몰아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 자기계발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강요된 자기계발의 논리에 동원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무책임이 아닌 용기다.

일을 못해도 괜찮다는 선언은 사실 멀리 퍼져나가지 않는다. 남들보다 일을 잘해야 하고 경쟁에서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자기계발의 논리는 여전히 공고하다.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다. 자신을 ‘일못’으로 규정하는 데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국가 역시 일을 잘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폭염을 알리는 데는 잘 작동하던 경보문자는 더 큰 재난인 지진 앞에서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개인에게는 가혹한 수준의 ‘일잘’을 요구하면서, 정작 일을 잘해야 할 사회 시스템은 ‘일못’이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은 그러한 거대한 거짓에 맞서는 아주 작은 몸짓일 것이다. 일 좀 못 하면 어떤가. 사실 우리는 일을 잘한다. 그러니까, 괜찮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