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회계사의 위기는 선망의 직장이었던 대형 회계법인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끊이지 않는 부실감사 논란과 미공개 정보를 활용한 주식투자 등으로 회계법인의 핵심가치인 신뢰성ㆍ공정성에 빨간 불이 켜진 지 이미 오래다. 정체된 매출과 늘어나는 퇴직자, 갈수록 줄어드는 공인회계사 시험 응시생은 대형 회계법인의 추락한 위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등록된 국내 4대 회계법인(삼일ㆍ삼정ㆍ안진ㆍ한영)의 2015 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에만 1,189명의 회계사가 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회계사(5,122명)의 23.2%, 4중 1명이 이들 회계법인을 떠난 것이다. 최근 3년을 봐도 2013년 947명, 2014년 968명, 2015년 1,189명 등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새 삶을 찾아 일반 기업, 금융공기업, 은행 등으로 이직하는 이들은 주로 경력 5년 안팎의 회계사들이다. 2년 전 공기업으로 이직한 김모(32ㆍ여)씨는 “파트너(임원)까지 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경우를 제외하면 밤샘근무를 밥 먹듯이 하고 지방출장도 많아 버티지 못하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선임과 신입 사이를 잇는 중간급 회계사들이 회계법인을 떠나고, 그 자리를 연차가 더 낮은 이들이 채우다 보니 회계감사의 질이 악화할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해 국내 1위인 삼일회계법인은 수습기간(2년)도 채우지 못한 회계사에게 감사 현장실무 책임자를 시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삼일회계법인의 소속 회계사 중 경력이 10년 이상인 사람(2015년 기준)은 21.2%에 불과하다.
이들 대형 회계법인에서는 최근 ‘사고’도 끊이질 않는다. 올해 3월 삼정(7명), 안진·한영(각 2명), 삼일(1명) 등을 포함한 12개 회계법인 소속 공인회계사 30여명이 감사 대상 기업의 주식을 불법 거래하다가 적발됐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삼일(26명)ㆍ삼정(4명)ㆍ안진(2명) 등 20~30대 회계사 32명이 아모레퍼시픽ㆍ다음카카오ㆍ제일기획 등 유명 기업의 미공개 실적정보와 증권사 예상 실적을 비교해 실적이 좋으면 주식을 샀다가 공시한 뒤 되파는 수법으로 불법거래를 해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회계법인의 수익성 악화는 회계사들의 열악한 처우를 불러오고, 이것이 결국 인력유출이나 부정거래에 대한 유혹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실제 2015 회계연도에 4대 회계법인의 총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조2,631억원과 222억원으로 전년보다 매출은 5.7%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11.2% 줄었다.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생의 80%가 입사하는 4대 회계법인의 총체적 위기가 계속 되면서 회계사 시험 응시생도 급감하고 있다. 2011년 1만1,910명이던 응시생 수는 지난해 8,388명까지 떨어졌다. 늘어나는 인력유출을 보충할 수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매년 1,000명 안팎의 합격생이 배출되면서 회계사의 희소성이 크게 떨어진 것도 회계사 시험 응시 및 회계법인 입사를 꺼리는 이유다. 지난해 은행으로 이직한 대형 회계법인 출신 이모(36)씨는 “회계사 선배들이 과거의 영광을 회상할 때마다 하는 말이 1990년대 초반 삼성전자 초봉이 1,800만원일 때 대형 회계법인 초봉이 4,000만원이었다는 이야기”라며 “회계사 초봉은 여전히 20여년 전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고 있어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형 회계법인의 위상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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