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주는 기업-회계법인 甲乙 관계
“싸게 해주겠다” 경쟁이 부실감사로
감사결과 문제 있어도 의견 못 내
“돈벌이에 신뢰 팔아” 비판까지
국내 회계투명성 61개국 중 꼴찌
대형회계법인 소속 A회계사는 수년 전 맡았던 대형 공기업 H사 회계감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감사팀이 제품 원가에 40억원이 추가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자 해당 공기업 회계실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룹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대국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이번 감사가) 충실히 돌아가면 관심이 많으신 3년 후 재계약 역시 고민하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표현은 공손했지만 ‘감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시 다음 번 재계약은 없다’는 협박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결국 이 회계법인은 감사보고서에 해당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
B회계사는 최근 그가 속한 회계법인 부회장으로부터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은 넘어가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가 감사한 중소기업의 영업이익이 회사에서 제출한 재무제표보다 3억원 적어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직후였다. 이 회사의 회계담당자는 “영업이익이 3억원 줄면 은행 대출을 받지 못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며 압박했고, 해당 감사를 따온 국세청 고위공무원 출신 부회장은 “큰일도 아닌데 봐주자”며 설득했다. B씨는 “부회장 등 임원들이 수주해 온 회계감사에 ‘한정’ 의견을 내기는 어렵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정’은 재무제표에 문제가 있을 때 감사인이 내는 의견이다.
‘자본시장의 파수꾼’으로 불리던 공인회계사들이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감사 재계약을 빌미로 한 회사들의 압박과 회사로부터 일감을 따온 회계법인 임원들의 회유 등 안팎에서 ‘을(乙)’의 위치에 놓인 회계사들이 제대로 된 감사를 하기 어려워진 까닭이다. 최근 한국공인회계사회가 ‘회계 바로 세우기 특별위원회’까지 설립하며 신뢰 회복에 나섰지만 저가수주 경쟁 등 구조적인 문제가 여전해 가뜩이나 낮은 국내 회계투명성이 더욱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미 국제기관이 평가한 국내 회계투명성은 바닥권에 머물고 있다. 18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평가한 국내 회계ㆍ감사 적절성 순위는 140개국 중 72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올해 조사에서는 61개 평가대상국 중 꼴찌였다. 설문조사에 근거한 결과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지만 회계사들 사이에서 “영업이익이 떨어진 회계법인들이 돈벌이에 혈안이 돼 신뢰를 팔고 있다”는 자조적 비판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다.
회계투명성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요인은 회계법인 간의 저가수주 경쟁, 그리고 감사를 받는 기업이 감사를 시행하는 회계법인에 일감을 주면서 만들어지는 회사와 회계법인 간의 갑을(甲乙) 관계다. 무엇보다 저가수주는 감사보수 감소→감사 투입인원 축소→부실감사 위험 확대 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출발점이다. 경기 둔화로 외부감사 대상 기업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주요 회계법인들은 정ㆍ관계 퇴직인사를 임원으로 앉힌 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영업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싸게 잘 맞춰드립니다’는 식으로 일감 따오기 경쟁을 하다 보니 저가수주, 감사부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한 회계사의 말이다. 한국공인회계사회에 따르면 100대 기업(금융사 제외)의 시간당 감사보수는 2008년 8만9,000원에서 2014년 7만5,000원으로 15% 줄었다.
수익률이 악화한 회계법인들이 감사 재계약을 앞두고, 혹은 컨설팅 등 이익사업 계약을 앞두고 기업 눈치를 살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공인회계사 박모(35)씨는 “감사에서 수정 사항이 나오면 재계약이 얼마 안 남았으니 이번 건은 잘 봐달라고 요청하거나 회계법인 임원에게 전화해 감사인을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감사보고서는 통상 2~3월에 나오고, 재계약은 4월에 이뤄지기 때문에 재계약(상장사 3년ㆍ비상장사 1년 마다)을 앞둔 회계법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업계 내부에선 자유수임제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기업이 자신들을 감사하는 회계법인을 직접 고르는 자유수임제 하에서는 이해상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장은 “회계 감사는 주주ㆍ채권자 등을 대신해 기업이 제대로 굴러가는지 살피는 작업인 만큼 공공재로서의 성격이 크다”며 “현행 자유수임제에서는 감사인이 독립성을 갖기 어려운 만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고, 감사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보수 기준표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총희 청년공인회계사회장도 “과거 횡령ㆍ배임으로 처벌받은 임원이 있는 회사, 불성실공시로 한국거래소의 제재를 받은 회사 등 제한적으로라도 감사인 지정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는 상장 예정 회사, 관리종목 지정 회사 등에 한해서만 자유수임제 대신 감사인 지정제를 적용하고 있다.
전문감사인제의 도입 필요성도 제기된다. 2010년부터 5년간 매년 6,000시간 이상 감사를 했으면서도 대우조선해양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하는 동안 해마다 ‘적정하다’는 의견을 낸 안진회계법인의 사례를 볼 때 무엇보다 전문성 회복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회계 감사의 신뢰성은 독립성과 전문성의 문제”라며 “의사가 모든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처럼 감사 분야마다 경험이 많은 회계사를 투입하는 전문감사인제를 도입하면 감사의 질과 감사보수 모두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금융위원회는 회계제도 개혁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감사 관련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 오는 11월 발표할 계획이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