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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대책이 통째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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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대책이 통째로 무너졌다

입력
2016.09.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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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국민 메시지도 없이

2시간 47분 뒤에야 긴급 지시

규모 6.5이상 지진 버틸 건물

10채 중 1채에도 못 미쳐

믿을 만한 피난 요령도 없고

재난 주관 KBS는 보도 외면

12일 한반도 지진관측 이래 최강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지만, 정부의 안이한 대처로 국민들은 밤새 불안에 떨어야 했다. 정부는 지진 발생 2시간 47분이 지난 뒤에야 공식입장을 늑장 발표했고, 국민안전처는 ‘뒷북 재난문자’를 보내는 등 정부의 재난대처 능력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규모 6.5 이상의 강진 발생 가능성이 현실화하면서, 내진설계와 대피 훈련 등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대책에 구멍이 있다는 점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국가 지진대비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구축해야 할 상황이다.

①정부ㆍ기관 ‘불협화음’

12일 오후 7시44분 경북 경주시에서 첫 지진(전진)이 발생한 뒤 18분만에 국민안전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꾸리고 비상단계 1단계를 가동, 유관기관 대책 논의를 시작했다. 오후 8시32분 역대 최대인 규모 5.8 지진(본진)이 발생한 직후인 오후 8시38분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지역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전 부처가 대책 논의에 참여하는 중대본 비상단계 2단계는 오후 10시 15분에야 이뤄졌다. 황교안 총리가 정부에 “피해자 구조와 복구에 만전을 기하라”는 긴급지시사항을 하달한 것은 오후 10시 31분, 첫 지진 발생 2시간 47분만이었다.

청와대는 지진 발생 직후 박근혜 대통령에게 수시로 상황을 보고하며 비상 대응 체계를 유지했다고 설명했으나, 대통령이나 총리가 대국민 메시지를 밝히거나 대책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메시지 발표를 검토했으나, 오후 9시40~50분께 대국민 메시지 발표나 청와대 차원의 긴급 대책회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박 대통령은 13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지진방재 대책 전면 재점검과 피해조사단 현지 파견 등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지진 피해규모가 크지 않다고 안이하게 판단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대응방침조차 내지 않은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일었던 ‘컨트롤 타워’ 논란을 의식해 재난 대응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지진에 대한 공포를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난위험을 경고하는 안전처의 긴급재난문자 통보시스템이 늑장을 부린 탓이 크다. 안전처는 전진 발생 8분 뒤인 오후 7시52분 진앙지 반경 120㎞ 지역에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했다. 본진 발생 후에는 9분여가 지난 오후 8시41분에 반경 200㎞ 지역에 2차 재난문자를 발송했다. 경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 주민들이 이미 강한 진동에 놀라 긴급 대피를 끝낸 시점이었다.

더욱이 기상청이 전진 발생 후 27초, 본진 발생 26초 만에 조기경보를 발령해 안전처 상황실에 알린 사실을 감안하면 국민의 안전을 외면한 긴급문자통보라는 비판이 나온다. 안전처는 “조기경보만으로는 정확한 진앙과 지진규모를 파악할 수 없어 기상청의 공식통보가 오기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촉각을 다투는 재난상황에서 안전처가 정확성에만 매달리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정거성 우석대 소방안전학과 교수는 “해외 사례를 보면 규모 6 이상의 지진이 발생할 경우 2, 3분 안에 건물이 무너지고 인명피해가 발생한다”며 “재난문자는 재난 사실을 신속하게 국민에게 알리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대략적인 상황만이라도 우선 전파하는 시스템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또 안전처가 문자발송 대상을 121개 지자체 주민(지진규모 5.5∼5.9 발생시 반경 200㎞ 이내)으로 한정한 것에 대해서도 “진앙에서 멀어도 여진이나 교통장애 등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문자 도달 범위를 제한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국민들에게 발생 사실을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안전처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향후 신속한 재난대책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박병철 안전처 지진방재과장은 “앞으로 기상청의 조기경보시스템을 활용해 긴급재난문자 발송 시간을 2,3분 내로 단축하겠다”며 “발송대상 또한 전 국민이 되도록 기준 완화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송용창기자 hermeet@hankookilbo.com

② 내진설계 ‘속수무책’

역대 최대 규모의 이번 강진으로 한반도에도 6.5 이상의 대형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됐지만, 국내 건물 상당수는 내진설계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강진에 견딜 수 있게 설계된 건물은 10채 중 1채에도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다.

현행 건축법은 3층 이상 또는 연면적 500㎡ 이상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수선할 때 5.5~6.0 규모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를 의무화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988년 처음으로 내진설계 의무화 정책(6층 이상 또는 연면적 10만㎡ 이상)을 시행한 이후 내진설계 대상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작년 9월부터는 3층 이상이거나 연면적 500㎡ 이상 건물에는 의무적으로 내진설계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대다수 건물은 지진 위험에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다. 내진보강 의무조항을 적용 받지 않는 사각지대가 많은 탓인데, 우리나라 전체 건축물 중 내진설계가 된 건축물 비율은 고작 6.5%에 불과하다. 우선 1988년 의무조항 최초 시행 이전에 준공한 건축물이 상당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4년 말 기준 준공 후 30년 이상 지난 노후 건축물이 전체 건축물의 34%에 달한다. 3곳 중 1곳 꼴이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2015년 네팔 지진 피해가 컸던 이유는 내진설계를 고려하지 않은 노후 건물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단독주택 또한 지진 사각지대다. 2005년부터 3층 이상 건물에 내진설계를 의무화했지만, 전체 단독주택 중 내진 성능을 확보한 비율은 3.2%에 불과하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41.5%)에 비해 현저히 낮다. “철근 등 구조를 지탱하는 구조물 없이 벽돌을 활용해 지은 소규모 주택은 지진에 매우 취약하다”(오창환 전북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 무너진 건물 중 94%가 3층 이하 건물이었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총 공사비의 10~15%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탓에 내진 보강을 하려는 건축주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지진 발생 시 주민들이 대피하는 장소조차 무방비 상태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김병욱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교육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전국 229개 기초지자체 가운데 관내 학교 시설 50% 이상이 내진 성능을 확보한 지자체는 세종시, 경기 오산ㆍ화성시, 부산 기장군, 울산 북구 등 5곳 뿐이었다.

내진설계 건물이 6.0 규모의 강진에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3~5층짜리 주택을 지을 경우 주로 시공을 맡는 영세업체들이 내진설계를 토대로 제대로 건축을 할 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③대피 매뉴얼 ‘무용지물’

밤새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린 시민들이 알고싶어 하는 지진시 대피요령도 믿을 만한 매뉴얼이 없다. 국민안전처의 지진 안전 매뉴얼을 찾아본 이들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며 일본에서 발행한 한글본 매뉴얼을 찾아보는 실정이다.

안전처가 국민재난안전포털에 게재한 ‘지진발생시 국민행동요령’은 모두 9쪽이다. 집 안, 집 밖, 전철, 산이나 바다 등 10가지 상황의 행동 요령을 설명하고 있는데, ‘테이블 밑에 들어간다’ ‘지하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된 물건을 잡는다’는 정도다.

울산에서 일하는 노모(29·여)씨도 12일 야근 도중 지진을 느낀 뒤 안전처 매뉴얼을 찾아보았다가 실망해 인터넷을 뒤져 일본의 매뉴얼을 다운로드했다. 일본 도쿄도가 발행한 ‘도쿄방재’ 한글판은 65쪽 분량에, 집 안의 경우 거실 주방 침실 화장실 2층으로, 집 밖의 경우 학교 번화가 지하상가 영화관 공항 등 다양한 상황의 대피요령을 담았다. 또 ‘식료품은 비축의날에 저장해 둔 음식을 가져갈 것’ ‘피난시 전등, 가스난로 등을 준비할 것’ 등 주의점과 ‘정부 지시만 기다리지 말고 학교 매뉴얼에 따라 밖으로 대피시킨다’ 등 내용도 담아 대피 이후 조치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안전처 매뉴얼과 대조적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대형 지진이 많지 않아 매뉴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대로는 만약의 사태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도시재난 생존 전문가인 우승엽씨는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손문 부산대 지질환경학과 교수는 “구체적 매뉴얼 마련과 함께 적정 수준 이상의 내진 설비 설치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④재난주관방송 ‘유명무실’

경북 경주시에서 12일 오후 규모 5.1과 5.8의 지진이 발생한 뒤 울산 남구 옥동에 위치한 울산대공원 정문에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 뉴시스
경북 경주시에서 12일 오후 규모 5.1과 5.8의 지진이 발생한 뒤 울산 남구 옥동에 위치한 울산대공원 정문에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 뉴시스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는 지진 보도를 외면해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인 5.8의 지진을 무시한 채 드라마 등 정규방송을 내보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재난방송 체계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KBS는 12일 오후 7시44분 첫 지진이 발생하자 3분 뒤부터 이 소식을 자막 방송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오후 8시32분 본진이 일어난 뒤에도 재난 특집 방송 등으로 전환하지 않고 정규방송을 이어갔다. 오후 8시와 8시45분 약 4분 가량의 뉴스특보를 방송했지만 이후 시사교양 프로그램 ‘우리 말 겨루기’와 일일 연속극 ‘별난 가족’을 예정대로 방송했다. 뉴스특보의 내용도 지진 발생 지역과 규모 등 기상청이 발표한 기본 정보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피해 사례나 대피 요령 등을 원했던 시청자들에게는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KBS는 방송통신발전기본법(제40조2)에 따라 재난주관방송사로 지정돼 재난상황과 대응책 등에 대해 신속하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지진 등 특정 재난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은 없다. 지난해 7월 구체성을 전면 보완했다며 기존의 ‘KBS 재난보도준칙’을 개정했지만 ‘정확하고 신속한 보도’ ‘공식 발표 자료 보도’ 등 개괄적인 내용에 그쳐 무용지물이란 비판이 나온다.

KBS와 달리 일본 방송의 재난보도 매뉴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재난방송 시스템을 자랑하는 공영방송 NHK는 보도국 내부에 기상재해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재난보도 가이드라인’에는 재난보도 책임자는 회사에서 반경 5㎞ 이내에 거주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돼 있다.

12일 뉴스를 시청한 시민들의 불만은 컸다. 회사원 조민구(30)씨는 “부산에 사는 부모님 걱정에 KBS를 봤는데 드라마가 나와 황당했다”고 비판했다. KBS의 이날 지진 보도는 종합편성채널(종편) JTBC보다 못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이연 한국재난정보미디어포럼 회장은 “이번 지진규모 정도면 방송사가 정규방송을 끊고 생중계로 전환했어야 한다”며 “재난 전문가 양성 등 방송이 평소 재난 대응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KBS 12일 오후 8시(사진 위)와 8시 45분 각각 내보낸 뉴스 특보. 특보가 끝난 뒤 드라마 등 정규방송을 내보내 뭇매를 맞고 있다. KBS 방송화면 캡처
KBS 12일 오후 8시(사진 위)와 8시 45분 각각 내보낸 뉴스 특보. 특보가 끝난 뒤 드라마 등 정규방송을 내보내 뭇매를 맞고 있다. KBS 방송화면 캡처

KBS는 “확인된 정보가 한정돼 있어 특보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특집 ‘뉴스9’와 ‘뉴스라인’ 등을 통해 속보를 지속했다"고 밝혔다.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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