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지각한 정의는 깨지지 않았다. ‘이태원 살인사건’진범은 항소심에서도 아더 존 패터슨(37)으로 결론났다.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윤준)는 13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패터슨 항소심에서 “피고인이 살해했다는 것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며 1심대로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당시 소년범이던 패터슨에게 내릴 수 있는 법정 최고형이다. 재판부는 “유족은 20년 가까운 세월 피해자가 곁에 없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끊임 없이 마주하며 고통스럽게 살았는데, 피고인은 용서를 구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재판장의 말에 피해자 고 조중필(당시 22세)씨 어머니 이복수(74)씨는 고개를 들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현장인 화장실 세면대에 묻은 핏자국에 주목해 패터슨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했다. 패터슨은 범행 당시 세면대 오른쪽 면과 화장실 벽 사이에 서 있다가 조씨를 밀쳤다고 주장해왔지만 재판부는 “핏자국과 패터슨 진술은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패터슨 진술대로라면 세면대에 많은 피가 묻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모순이 안 되려면 밀침을 당한 조씨가 피고인이 그 자리에서 비킨 사이 다시 세면기 쪽으로 다가가 짚었어야 했다”며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0.14%인데다 급소를 9차례나 찔린 조씨가 몸을 다시 추스르고 세면대로 올 수 있었을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1998년 대법원이 현장에 있던 유일한 공범 에드워드 리(37)의 살인 혐의 상고심에서 사실상 패터슨을 진범으로 지적한 논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판단이다. 1심은 칼날 길이가 9㎝로 짧아서 피해자와 가까운 곳에서 찔러야 해 진범은 손과 옷 등에 피가 많이 묻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좀더 무게를 두고 패터슨을 진범으로 봤다.
범행 뒤 화장실을 먼저 나간 사람도 패터슨이라고 항소심은 판단했다. 두 사람 모두 “진범이 화장실을 먼저 나갔다”고 주장해 재판부는 누가 먼저 나갔느냐를 가리는 것은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밝혀낼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같은 건물에 있던 친구 등 진술을 보면 패터슨이 칼을 들고 먼저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패터슨에게 살인을 부추긴 리의 진술에 보다 믿음이 간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어 “패터슨의 범행 뒤 행동은 피해자를 9차례나 찔러서 묻은 피를 닦고 재빨리 현장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라면 취할 것으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씨의 어머니 이씨는 선고 뒤 “이제 죽어서 중필이 하늘에서 만나도 좀 떳떳할 거 같다. 억울한 게 밝혀져서…”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대법원 판결이 어떻게 날지에 신경을 썼다. 패터슨 측은 상고하기로 했다.
패터슨은 1997년 4월 3일 밤 10시 5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조씨를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검찰이 출국정지를 연장하지 않은 틈을 타 1999년 8월 미국으로 도주했다가 지난해 9월 16년 만에 송환됐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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