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에서 세수하듯 쉬운 일이 다른 나라에선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신기한데 점점 불편을 느낀다. 여기는 불멸의 중남미, 불편은 '빠르고 쉽게' 찾아왔다. 그 중에도 화룡점정은 단연 교통체증, 아니 도로 두절이다. 퍼런 대낮에 2차선 양쪽 도로 차단, 사전 예고 없이 도로가 끊겨 있다. 이유를 알고 나면 더욱 어이가 없다. 그 경험의 끝, 볼리비아 라파즈에서 산타크루즈로 가는 길 한 복판에서 25시간 버스에 고립되어 있었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에서 '아무도 안 가는' 제수잇 미션 서큇(Jesuit Mission Circuit, 카톨릭교가 빈촌에 포교 및 봉사 활동을 했던 코스)을 훑겠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산타 크루즈행 버스를 물색했다. 입구에서 접근한 삐끼는 카마(cama, 침대식 좌석)임을 강조하며 220볼(약 3만5,000원)이란 천문학적 가격을 제시했다. 소요 시간은 17~18시간. 장시간 버스에서 시달릴 것을 고려할 때, 카마는 당연히 끌리는 유혹이었다. 단,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면 가격이 내려가는 볼리비아식 협상을 해야 했다.
"150볼(약 2만4,000원) 아니면 곤란할 것 같아. (갸우뚱)"
곤란함 없이 이 가격에 낙찰됐다.
세상에서 처음 버스를 탄 사람처럼 우린 호들갑을 떨었다. ‘침대형 좌석이 어젯밤 매트리스보다 100배 낫구나, 발 앞 널찍한 공간이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급이야, 노상 방뇨 없이 문명인처럼 버스 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어’ 등등. 중남미 여행 거지의 주책이 이어졌다. 함께 탑승한 승객도 오랜만에 말끔한 행색이었다. 창 밖은 흐렸지만 우리의 마음은 맑음이었다.
오전 7시쯤이다. 숙면에서 깼다. 흔들흔들 요람 기능을 하던 버스가 멈춰 있다. 아예 엔진까지 끈 채(버스에서 가장 나쁜 징조다) 서 있다. 우리 버스만이 아니었다. 추석 귀성길의 기시감인 듯 불안했는데, 이유를 알고는 기가 찼다. 현재 다리 공사 중이란다. 귀하신 인력이 정부 지원으로 ‘오늘의 일’을 시작하신 거다. 사전에 길을 막는다는 경고 따윈 없었다. 그들은 그저 일을 시작한 것뿐이었다. 기사가 미심쩍게 말한 일말의 희망이라면 인부들의 점심 시간을 노리는 것. 하지만 그들이 아침을 잔뜩 먹어 점심식사가 늦어진다면? 왼손에 간식을 든 채 오른손으로 드릴을 이용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문 이 정차 행렬이 과연 언제쯤 사그라들지 의문이었다.
승객들은 하나 둘 이 안락한 침대를 떠나기 시작했다. 기사의 추측을 신임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 즈음 도로에서는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남미표 퀵서비스 오토바이 등장! 단, 물건 대신 사람 배송이다. 이곳에서 우회해 목적지행 버스를 탈 곳까지 운송하는 단기 아르바이트생이 도처에 깔렸다.
더 경이로운 건 이 피난 풍경이 아니라 기다리는 현지인의 태도였다. 이들은 하염없는 기다림에 '각오' 따윈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가령 '1시간째 기다리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엔 채 1분도 기다리지 않은 듯한 여유가 묻어났다. 이미 기다림에 이골이 나서일까? 딱히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뜬눈으로 기다린다. 산방에 들지 않고도 깨달은 무념무상의 자세였다.
명절마다 밀리는 도로에서 귀성객의 짜증도 하늘을 찌를 것이다. 하지만 이 체증의 이유는 합당하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합당하지 않은 이유로 정차한 산타크루즈행 버스는 7시간 후 시동을 걸었다. 1박2일 버스 탑승인 셈이다. 귀성객들이여, 피할 수 없다면 즐기시길. 끝나지 않는 고통은 없다. 그저 시내버스를 10분만 기다려도 화가 치미는 LTE급 속도에 우리가 너무 익숙한 건지 모른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사진 rve around
▦ ‘She said, Il dit. 그녀는 말했고, 그도 말했다’ 전시안내
‘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 전시합니다. 1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1시간 죽치게 되는 놀이터. 여 vs 남, 한국인 vs 프랑스인, 에디터 vs 포토그래퍼로 함께 여행하면서 느낀 ‘같은 공간, 다른 시선’을 이야기합니다. 사진과 일러스트, 여행 노트와 가방 등 각종 스토리로 정성껏 채웠습니다. 건너오세요. 슬그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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