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라 했는데에~ 잊어달라 했는데에~”
아침 10시 기자 앞에서 나훈아 ‘영영’을 부르는 성악가라니. 학창시절 별명이 ‘장녹수’(트로트 중에서도 KBS 드라마 ‘장녹수’ 타이틀곡을 특히 잘 불렀단다)였던 이 엉뚱 발랄한 남자는 바리톤 김주택(30).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정명훈 키드’다.
2011년 정명훈이 지휘한 국립오페라단의 ‘시몬 보카네그라’에서 악역 파올로 역을 맡았던 그는 유럽과 일본, 한국에서 여러 차례 정명훈과 오케스트라 협연을 했다. 그리고 지난 달 31일 역시 정명훈이 지휘한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합창단 내한공연에서 같은 작품, 같은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세계 5대 오페라극장인 라 스칼라 프러덕션과의 작업은 “이탈리아 유학 12년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김주택은 5일 서울 정동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원래 꿈은 테너였다”며 “변성기가 지나며 목소리 톤이 낮아져 바리톤으로 전향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명절이나 할머니 댁 김장하는 날 어른들 계시면 트로트 자주 불렀어요. 고음이 잘 올라가서 중학생 때까지 록발라드 가수가 꿈이었죠.”
곱상한 외모, 유쾌한 성격 때문에 노래도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부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2004년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으로 유학 간 후 국내외 굵직한 대회를 휩쓸었고, 2009년 잔도나이 국제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잔니 탕구치를 만나며 음악 인생에 날개를 달았다. 라 스칼라와 피렌체 등 유명 오페라 극장의 캐스팅 디렉터를 맡은 이탈리아 음악계 거물인 탕구치는 김주택을 2009년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 역으로 데뷔시켰고 그가 캐스팅을 맡은 오페라 극장에서 ‘세비야의 이발사’ ‘사랑의 묘약’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나비부인’ ‘청교도’ 등에 기용했다. 세계적인 바리톤 레오 누치로도 “전설의 바리톤 피에로 카푸칠리와 비슷하다”는 찬사를 했다.
넉살 좋게 자기 자랑을 꺼내놓는 이 남자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오페라에서 주요 배역을 맡기에는 너무 젊다는 것. 바리톤에게 맞는 배역은 주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아버지 제르몽과 오페라 ‘리골레토’ 곱추 리골레토처럼 고령에 맞춰져 있다. ‘나쁜 남자’를 연기하며 여성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테너 배역이 아직은 부러운 나이다.
20~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하는 오페라 콜라주 ‘카사노바 길들이기’는 테너들의 전매 특허 배역이었던 ‘바람둥이’ 역할을 바리톤에 맡긴 공연이다. 기획사는 일찌감치 김주택을 염두에 두고 이 주크박스 뮤지컬 같은 유명 오페라의 주요 아리아를 모은 공연을 구상ㆍ제작했다. 김주택은 이 작품에서 영화감독 준 역을 맡아 오페라 ‘돈 조반니’의 ‘그대 창가로 오라’ ‘샴페인 송’, 오페라 ‘돈 파스콸레’의 ‘천사처럼 아름다운’ 등을 부른다.
꿈에 그리던 나쁜 남자 역을 맡은 소감은 “3년 전 제안 받고 바로 수락했다”는 말로 대신했다. “연습 첫날 노래가 아니라 걷기 연습을 시키시더라고요. 동선이나 몸짓, 표정이 오페라와 연극이 달라 제 모습을 새롭게 알게 된 계기도 되죠.” 드디어 여주인공과 키스도 하는 거냐는 질문에는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눙친다. “무대에서 확인하세요.” (02)2016-2021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