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붕괴론’ 좇다 핵개발 시간만 벌어 줘
독자적 핵무장, 전술핵 배치는 비현실적
압박ㆍ제재 일변도 탈피 프레임 전환해야
미국과 맞서다 이라크처럼 될까 우려한 리비아가 2003년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자 북한이 논평을 내놨다. “스스로가 힘을 길러 놨을 때 평화가 보존될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카다피 정권이 ‘아랍의 봄’때 붕괴된 가장 큰 이유가 핵 포기였다고 북한은 확신했다. 미국의 6자회담 차석대표였던 빅터 차는 북한 대표단 중 한 명이 “당신들이 아프간과 이라크를 공격한 이유는 핵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술회했다. (‘불가사의한 국가’. 2016)
생존을 위해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북한은 지금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2006년 첫 핵실험 감행 후 “핵 보유국 신분을 갖게 됐다”고 했던 북한이 10년이 지난 이번 5차 핵실험 후에는 “핵탄두를 마음먹은 대로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됐다”고 큰소리쳤다. “핵 보유국에 맞먹는 핵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건드릴 생각하지 말라”는 시그널인 셈이다.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는 거꾸로 한국과 미국의 북핵 정책 실패를 의미한다. 미국은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제네바합의를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였지만 조지 W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정부도 기대와 달리 ‘전략적 인내’라는 소극적 전략으로 일관했다. 북한의 5회 핵실험 가운데 4회가 오바마 재임 중 실시된 것이 정책 실패를 입증한다.
지난 9년간 한국의 보수정권은 제재와 압박을 북핵 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다. 그 바탕에는 ‘북한 붕괴론’이 깔려 있다. “곧 무너질 북한 정권과 교류와 협력이 왜 필요하냐”라는 이명박정부의 잘못된 인식이 박근혜정부에서는 ‘신뢰 프로세스’를 밀어내고 대북정책의 중심축이 됐다. 동유럽 사태와 아랍의 봄 같은 민중 봉기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북한에서 정권 붕괴는 허상이나 다름없다. 설혹 김정은이 제거된다 해도 그것이 북한 체제 붕괴를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확실한 근거도 없는 북한 붕괴론에 매달리는 사이 북한 핵 문제는 손쓸 수 없는 단계로 악화했다.
더 큰 고민은 북한이 핵 완성화 단계로 치닫고 있는데도 마땅한 대응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개성공단 중단과 확성기 방송 재개 등 카드를 다 써 버린 상황에서 남은 것은 군사적 조치와 국제 공조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핵 무장론은 미국 등 서방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현실적이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전술핵 재배치 역시 비핵화 원칙의 포기이며 이는 일본 등 동북아 지역의 ‘핵 도미노’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군에서 밝힌 북한 수뇌부‘참수 작전’과 핵ㆍ미사일 기지 선제 타격은 위성과 무인정찰기 등 전략자산 부족을 고려하면 엄포에 가깝다. 무엇보다 전시작전권 환수에 기를 쓰고 반대해 놓고 이제 와서 우리의 독자적 무장과 작전에 목소리를 높이는 보수세력의 태도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샐 틈 없는 국제 공조가 이뤄지려면 북한의 목줄을 쥔 중국의 역할이 절대적이지만 중국이 핵실험을 이유로 북한을 전략적으로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드 한반도 배치 등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 엄존하고 한미일 군사협력이 강화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북핵 문제는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국면으로 진입했다. 군사적 타개나 경제적 제재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면 프레임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결국은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큰 틀의 포괄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지난해 방한한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은 “우리가 원하는 북한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대통령은 “김정은의 정신 상태가 통제 불능”이라고 했지만 뉴욕타임스는 “북한은 미치기는커녕 너무 이성적”이라고 분석했다.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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