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중문화 영역에서 역사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방송과 웹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가 주요 소재이자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대중문화가 역사교육의 역할을 하고 있다”(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평가가 나올 만큼 반응도 뜨겁다.
스크린에선 지난해 1,27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 이후 ‘사도’ ‘귀향’ ‘동주’ 등 역사물이 줄줄이 흥행했다. 올 여름에도 ‘덕혜옹주’와 ‘인천상륙작전’이 각각 550만, 700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추석을 앞둔 극장가에선 일제강점기 의열단의 활약을 그린 ‘밀정’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 비화를 담은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KBS가 3년여간의 기획과 준비를 거쳐 지난 3일 첫 선을 보인 5부작 드라마 ‘임진왜란 1592’는 기대 이상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극장판 상영 요청까지 받고 있다. 고려시대 배경의 SBS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와 청춘사극 KBS2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퓨전사극도 여전히 강세다. 조선시대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는 가정 하에 역사를 재치있게 풀어낸 무적핑크 작가의 인기 웹툰 ‘조선왕조실톡’은 케이블채널 MBC에브리원에서 ‘툰드라쇼’라는 제목의 콩트형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역사 콘텐츠의 인기는 대중의 역사인식을 환기하며 역사는 지루하고 어렵다는 선입견까지 바꾸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중문화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에서 이유를 찾는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역사물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며 “창작자들이 역사적 사실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잘 접목해 세련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덕현 평론가도 “역사를 무겁지 않게 오락으로 풀어내면서도 그 안에 의미까지 담아냈기 때문에 대중의 호응을 얻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역사와 무관하다 여겨졌던 예능프로그램도 역사 문제를 아이템으로 다뤄 호평 받은 경우가 많다. MBC ‘무한도전’은 아이돌그룹 멤버들과 함께한 TV 역사특강과 미국 로스엔젤레스(LA)에서 촬영한 도산 안창호 편을 방영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9월 ‘배달의 무도’ 편에서는 1940년대 일본의 군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던 일본 교토 인근의 우토로 마을의 아픔을 전하며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역사를 돌아봤다.
KBS2 ‘1박2일’ 도 지난 3월 중국 하얼빈 편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되짚었다. 하얼빈 역과 뤼순 감옥,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묘역까지 돌아본 출연진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 방송은 올해 한국방송대상 예능버라이어티 부문 작품상에 선정됐다. 정 평론가는 “출연진이 직접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역사의 아픔을 느끼고 경험하며 길잡이가 되어준 덕분에 시청자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잘 만든 역사 콘텐츠는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무한도전’에서 일본에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 공양탑이 소개된 후 그곳을 정비하는 작업에 시청자들의 도움이 쏟아졌다. ‘암살’의 흥행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됐고, 7만5,000여 시민들이 제작비를 보태 만들어진 ‘귀향’은 한일 위안부협상의 부당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 우리사회 일각의 퇴행적 행태에 대한 저항감과 경각심도 깔려 있다. 주 교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같은 역사 관련 이슈들이 대중들에게 역사적 진실이 훼손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줬다”고 지적했다. 정 평론가는 “역사교육의 부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역사 콘텐츠의 인기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대중문화 콘텐츠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도 잇따른다. 영화나 드라마에 담긴 역사를 허구가 아닌 사실로 여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덕혜옹주를 항일의식을 지닌 인물로 그려 평단의 비판을 받았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경우도 학계 한편에선 영화 속 내용과는 달리 김정호 신화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의해 꾸며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 교수는 “역사 콘텐츠가 역사적 사실에 100% 충실한 것처럼 과장할 경우 대중의 역사 지식에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며 “제작자들이 역사적 진실은 무엇이고 허구는 무엇인지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뒤늦게 논란이 불거지면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달라”는 식으로 안이하게 대처하지 말고, 미리 제작 과정에서부터 전문가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고증이나 재현에 얽매어 역사적 상상력을 제한 받는 상황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주 교수는 “지나치게 사실을 강조하다 보면 제작자들의 창작 의욕을 꺾게 된다”며 “역사 콘텐츠를 제작자들이 바라고 꿈꾸는 역사의 모습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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