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삼시세끼’ 고창편의 귀여운 아기 오리들을 보며 군침을 흘린 적이 없었다. 맹세한다. 어느 날 스산한 바람이 불자 오리 구이가 먹고 싶었을 뿐이다. 오븐에서 잘 구워진 오리는 나무껍질처럼 노릇한 껍질 속에 기름과 수분을 촉촉하게 머금은 살코기를 감추고 있었다. 접시로 옮겨진 오리 한 덩어리의 바삭해진 껍질에는 로즈마리 꿀을 발랐다. 낙엽 같은 포트 와인 한 모금, 향긋하고 기름진 가금류 고기 한 입. 꿀맛이다.
경리단길 댄디핑크의 오너셰프 더스틴 웨사는 채집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숲 속의 요리사다. 돼지고기 삼겹살에 꿀을 입혀 베이컨을 만드는데 그의 선택은 밤꿀이다. 쌉싸래한 밤꿀 향이 녹진한 돼지 비계와 맞아떨어진다. 한국의 풀숲을 헤치고 다니는 미국 출신 캐나다인 더스틴의 밤꿀 베이컨을 구워 먹는 맥주 술상은 나도 함께 밤꽃 핀 여름 들판을 걷는 것 같은 호사다.
세상 모든 꿀은 다 다른 맛
세상의 설탕은 모두 달지만, 세상의 꿀은 모두 달기만 하지 않다. 동시에 다 다르다. 꽃의 화밀(nectar)이 채집과 분해(벌이 몸 안의 벌집에 모아 온 꿀에 벌이 분비하는 효소가 뒤섞이며 화밀의 전분이 당 분자들로 분해된다. 어떤 효소는 포도당 일부를 산화시켜 꿀의 pH를 낮추어 미생물 번식을 막는다), 증발(묽은 화밀을 반복적으로 코 밑으로 방울 형태로 꺼내 놓으며 수분을 40~50%까지 증발시키고, 그것을 벌집의 얇은 막 안에 담은 후에는 날갯짓을 통해 20%대까지 증발시킨다. 분해와 증발의 숙성 과정은 3주가 걸린다)을 담당하는 꿀벌과 수확과 여과(채밀기와 거름망 등 장비가 사용되며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는 낮은 온도로 가열하기도 한다)를 담당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꿀 속에는 다양한 성분이 들어 있고 신맛, 쓴맛, 떫은 맛까지 다양한 맛이 섞여 있다.
그 각각의 맛 요소가 나름의 균형을 완성해 세상 모든 꿀은 다 다른 맛을 낸다. 심지어 같은 벌집에서 나온 꿀도 다 다르다. 자연이 돌린 룰렛이다. 룰렛 안의 공은 돌고 돌아 꿀은 마치 와인과도 같은 무한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꿀 맛은 날아갈 듯한 샴페인에서 묵직한 시라, 미묘한 포트와인까지 와인 하나하나에 다 대입해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해외에는 꿀 소믈리에도 있다. 꿀의 맛을 보고 음식과 마리아주(Mariage)까지 권하는, 딱 와인의 소믈리에가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한다.
꿀맛은 꽃따라, 양봉업자따라
국내에서 생산되는 꿀만 해도 충분히 다양하다. 일반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에서는 아카시아꿀, 잡꿀 정도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소규모 양봉업자들을 찾아 보면 얼마든지 팔도강산의 꽃에서 수집한 다양한 꿀을 구할 수 있다. 그 꿀의 맛을 음식과 조합시켜보는 건 꽤나 흥미진진한 맛 조합이다.
지난 7월 하순 서울 명동성당 1898 광장에서 열린 ‘마르쉐@명동 꿀+향’에서는 ‘꿀.건.달’, ‘히즈 허니’, ‘산향 벌꿀’, ‘자연의 뜰’, ‘준혁이네’, ‘우보 농장’, ‘맹추네 농장’, ’영진 양봉원’, ’어반비즈 서울’, ’토종벌의 꿈’, ’댄디핑크’, ’차차로’ 등이 꿀을 들고 나왔다(8월을 건너뛰고 오는 11일 열리는 ‘마르쉐@혜화’에는 꿀.건.달이 산벚나무꿀, 아카시아꿀, 팥배나무꿀, 감로꿀, 밤꿀을 들고 나온다). 행사 일환으로 열린 ‘도시의 꿀 농부 어반비즈 박진의 꿀과 맛 이야기’ 워크숍에서는 여덟 종류의 꿀을 비교해 보며 맛볼 수 있었다. 강연자로 나선 박씨는 도심양봉을 하는 사회적 기업 ‘어반비즈’ 대표다.
준혁이네가 내놓은 아까시꿀은 익히 먹어온 ‘아카시아꿀’이었지만, 진지하게 맛을 보니 마치 드라이한 브뤼 샴페인처럼 날아갈듯 경쾌하고 엷은 시원한 맛이었다. 차차로의 감귤꿀에서는 감귤류 과실 특유의 새콤한 향이 스쳤다. 가벼워 보이는 색과 달리 맛은 두터워서 숙성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뜰이 내놓은 ‘여러가지 꽃꿀’은 산미가 살짝 얹힌 달콤하고 가벼운 맛이었다. 감꽃, 찔레꽃, 아카시아꽃에서 온 꿀이라고 했다. 히즈 허니의 피나무꿀은 마치 샤블리처럼 기분 좋은 신맛을 냈다. 그러면서도 툭 치고 올라오는 단맛이 좋은 꿀이었다. 꿀.건.달의 팥배나무 꿀은 마치 밤이나 고구마, 팥 앙금을 먹는 것 같은 구수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특색 있었다. 순서대로 꿀의 색은 점점 짙어졌지만 맛의 짙기와는 상관 관계가 없었다.
꿀은 여름이 남긴 매혹의 맛
우보 농장의 풀꽃밤꿀부터는 꿀의 색도 ‘토종꿀’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시골 시장의 꿀들처럼 짙어지기 시작했다. 맛과 향도 포트와인의 오묘함으로 넘어간다. 우보 농장 풀꽃밤꿀은 밤의 고소한 향과 더불어 강한 산미가 어우러졌다. 밤꽃과 갖가지 야생화에서 모인 꿀이다. 맹추네 농장의 여러 가지 꽃꿀은 꿀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달콤함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이 한약 같은 쓴맛이었다. 밤꽃, 클로버, 민들레가 피는 지역에서 딴 꿀이라고 했다. 영진양봉원의 메밀꿀은 놀라울 정도로 까맸다. 맛은 한약재에 청량한 맛이 더해졌다. 숙취해소 음료를 연상시키는 향이었다.
단지 여덟 가지 꿀을 맛본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꿀맛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설탕보다 슬쩍 덜 달고, 은은하게 새콤한 향이 나는 꿀 밖에 더 넓은 꿀맛의 세계가 있었다. 그 각각의 꿀이 가진 맛(꿀은 천연 조미료로 흔히 비유된다)을 어떤 요리에 어떻게 쓸까 하는 가능성만으로도 요리사들에겐 재미있는 숙제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이제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잎이 떨어질 채비를 하는 가을에 접어들었다. 여름이 남기고 간 것은 꿀, 그 기기묘묘하고도 다채로운 매혹의 단 맛이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양봉, 나도 해볼 수 있을까?
지난달 16일 서울 상도동 ‘핸드픽트 호텔’ 옥상에선 여름내 벌들이 모은 꿀을 처음으로 수확하는 자그마한 기념식이 열렸다. 어반비즈 서울에서 펼치고 있는 사업, ‘허니 뱅크’ 중 하나인 이곳의 벌통에 투자한 이들이 모인 자리였다. 결론부터 말해 양봉은 농사나 마찬가지라서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대신 도심양봉에는 누구라도 비교적 쉽게 참여할 수 있다. 동작구에서도 상도동이라고 하면 어떻게 봐도 서울의 주거지역 한 가운데이지만 이곳에서도 꿀벌들은 신나게 꿀을 모았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살 수 없고, 식물이 절멸하면 동물도 살 수 없어 인류의 안위까지도 걱정해야 한다는 위기론은 여전히 진행형의 환경 이슈다. 어반비즈 서울 박진 대표는 도심양봉이 멸종 위기에 처한 벌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열섬 현상이 나타나는 도심은 벌이 좋아하는 따뜻한 환경이며 주변에 녹지만 있다면 벌은 충분한 꿀을 얻을 수 있다. 서울 시내에는 동네마다 산이 있어 벌이 살기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 미세먼지 가득한 도심에서 생산되는 꿀이지만 벌이라는 자연의 생체 필터를 거치기에 안전하다.
허니 뱅크는 현재 서울ㆍ경기권에 총 27군데서 운영되고 있다. 핸드픽트 호텔 옥상뿐 아니라 예장동 서울시청 남산별관 옥상, 정동 영국대사관 정원, 명동 유네스코회관 옥상, 여의도 한국스카우트연맹 옥상 등에 허니 뱅크의 벌통이 놓여 윙윙대고 있다. 군자동 어린이대공원에도 인적이 뜸한 곳에 벌통이 놓여 있다. 음식 냄새 등 벌들을 유인할 만한 요소가 많은 주거 지역이 아니라 이렇게 번화한 곳들에 놓인 벌통을 오가는 꿀벌들은 인간의 동선과 완연히 다른 동선으로 움직인다.
허니 뱅크는 투자를 할 수도 있고, 장소를 제공할 수도 있는데 관리는 모두 어반비즈 서울이 맡는다. 양쪽 다 꿀을 돌려 받는다. 내년 봄에는 내 꿀벌들이 모아온 미지의 꿀 맛을 기대해보면 어떨까? 다음 조건만 맞으면 어디에든 허니 뱅크의 벌통이 온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벌통이 설치될 수 있는 곳은 거주지로부터 30m 이상 떨어진 곳이어야 한다. 벌들이 꿀을 모아올 수 있는 거리인 반경 2㎞ 이내에는 꽃이 피는 녹지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꼭 꽃밭이 아니어도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우기에 벌들은 뾰족한 나무에 맺힌 제 아무리 작은 꽃도 찾아 간다. 또한 꿀벌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반경 안에는 공장이나 골프장 등이 없어야 한다. 물론 항공 방제 지역도 벌통을 놓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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