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해가 지지 않는다.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에도 밤 8시만 지나면 땅거미가 지던 동네에 살다 자정 무렵 겨우 어둠이 깔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맞는 첫날 밤은 잠을 설치기에 딱 좋았다. 이곳에서는 지구 경도차에 의한 시차보다 위도차에 따른 일출, 일몰 시간이 이방인의 고정관념을 뒤흔들어 놓는다.
7월 말 북위 59도 56분의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밤드리 노니다가 호텔방 7층 둥지에 터를 잡아보니 창 밖으로 네바강의 야경이 그림같다. 강변 도로에는 차량 헤드라이트가 꼬리를 물고 강물은 조명을 받아 넘실거린다. 베란다에서 몽상에 취해 있을 무렵 네바강이 조화를 부린다. 강 중간의 다리가 절반으로 갈라지더니 양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어릴 적 봤던 부산 영도다리가 옮겨왔나 싶었다.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들은 핀란드만으로 빠지는 유조선과 대형 선박들을 위해 새벽 1시가 지나면 순차적으로 허리를 번쩍 든다. 오전 5시까지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3시를 전후로 20분 정도 원위치한다고 한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백야(白夜)를 만끽하고 나니 낮에는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백야를 본 것으로 본전 뽑은 셈 치면 되긴 한데 이 도시는 볼 것이 너무 많았다. 세계인이 공인하는 문화예술의 도시,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겨울궁전으로 널리 알려진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우리말로 하면 ‘은둔’ 박물관이다. 촌놈들이 서울가서 63빌딩부터 올라가듯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이곳은 단연코 이 도시의 제1 방문코스다. 은둔하려해도 세상이 은둔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곳이다.
1,000개가 넘는 방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 이름만으로 쟁쟁한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품, 장신구, 옷 등 소장품만 300만점이라고 한다. 워낙 예술에 까막눈이다보니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박물관의 작품과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어느 박물관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 도록을 꺼내봐야 할 정도다. 그런 가운데서도 루벤스의 ‘로마인의 자비’라는 작품 만은 기억이 생생하다. 감옥에서 피죽 한 그릇 먹지 못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는 딸을 그린 작품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이방인 눈에는 도대체가 돌상놈의 그림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됐던 간에 이런 그림을 버젓이 그린 인간도 그렇고,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도 수준 이하였다. 한 동안 그림 앞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돌아섰다. 예술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하나 하나 뜯어보려면 몇 달이 걸려도 부족한 미술관을 2시간 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하긴 문외한이 더 오래 본다고 무엇이 달라질까만은 가끔 눈에 익은 작품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궁전이 있으니 당연히 여름궁전도 있을 터였다. 겨울궁전이 예카테리나 2세의 작품이라면 여름궁전은 피터 대제의 창조물이다. 도시에서 29㎞ 정도 떨어진 핀란드만 해안 지대의 여름궁전은 대궁전과 유럽식 정원, 수십개의 분수가 압권이다. ‘사자의 입을 찢는 삼손’, ‘황금동산’, ‘아담’ 등 유명한 분수들이 널려 있다.
여름궁전 한 켠에서는 결혼 사진을 찍는 남녀 한 쌍이 부지런히 포즈를 바꿔가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전 세계 관광객이 총집합한 장소에서 연미복과 흰색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즐기거나, 아랑곳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다. 지난해 10월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 앞 광장에서도 중국인 한 쌍이 결혼 사진을 찍는 걸 보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외국인 들먹일 필요도 없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우리나라 신혼부부 한 쌍이 에펠탑 앞에서 결혼 예복 그대로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디서든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되는 배경이 부러울 따름이다.
숨 좀 돌리고 운하를 누빈다. 곁가지 떼고 극장 120개, 성당 200개, 다리 500개, 섬 100개, 동상 400개인 이 도시에서 운하는 68개란다. ‘북방의 베니스’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운하를 누비는 배는 관광상품이자 교통수단이다. 배 안에서 한 잔의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네바강의 정취에 젖는다. 뱃노래가 흥얼흥얼 나오려 한다. 배는 운하 중간중간 작은 다리 밑을 지나다 네바강 본류로 나와 물살을 헤친다. 사람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손을 흔드는 내 꼴을 보니 보드카에 취했거나 분위기에 취했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은 호수나 강, 바다를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니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은 삼가야 한다. 보드카는 더 더욱 금물이다.
해군성 건물 옆에는 이 도시의 랜드마크인 이삭 성당이 우뚝 서 있다. 성당 앞 벤치에서 그림 그리는 아가씨에 잠시 한 눈을 팔다 성당을 오른다. 천장 꼭대기의 비둘기, 베드로 등 12사도의 대리석 성화 등 미술작품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높이 43m의 사원 정상에서 보는 도시의 파노라마다. 해군성 탑과 피터요새의 교회 탑이 수직선을 이루는 이 도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부채꼴 형태의 카잔 성당 앞 책방을 서성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과거와 현재’라는 화보를 만났다. 2013년 발간된 이 책에는 도시의 명소가 100년의 간격으로 사진에 담겨 있었다. 현재의 모습은 칼라, 과거의 모습은 흑백이었다. 책 한 권으로 시간여행까지 해버렸으니 실제 눈으로 본 것은 손가락을 꼽는데 마음은 도시를 다 훑은 듯 교만해진다.
백야의 도시는 다른 말로 흑주(黑晝)의 도시기도 하다. 6, 7월에 밤이 없다면 12, 1월에는 낮이 없는 것이다. 겨울이면 오전 10시가 넘어야 해가 뿌옇게 뜨고 오후 4시면 어둠이 깔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면서 극단적인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사건이 예술의 자양분이라고 짐작해본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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