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의 땅덩이는 특이하게 생겼다. 서해로 툭 불거져 나온 태안은 리아스식 지형의 표본으로 들쭉날쭉한 땅줄기와 바다가 뒤엉켜 있다. 태안의 해안선 길이는 무려 530여㎞. 태안이 접한 바다가 그만큼 땅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태안은 예부터 수운의 요충이었다. 하지만 뱃길이 편치는 않았다. 특히 태안의 안흥 해역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선박의 침몰사고가 빈번했다. 배가 지나기 어렵다고 ‘난행량(難行梁)’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안흥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곡선이 한 해 40~50척씩 이르기도 했다. 안면도 남쪽의 쌀썩은여도 세곡선이 많이 침몰하던 곳이다. 조곡 한 톨이 아쉬운 국가에선 태안의 파도와 암초를 피해 안정적인 운항로 확보가 절실했다. 고려 때부터 태안반도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잇는 운하가 추진됐던 이유다. 결국 이 운하공사는 땅 속의 거대한 암반 때문에 접어야 했다. 대신 조선 인조 때 안면곶을 가로지르는 좁은 운하가 뚫렸다. 쌀썩은여라도 피해가자는 것. 비죽 나온 땅줄기였던 안면도는 이렇게 섬이 됐다.
태안의 길고 긴 해안을 따라 30여 곳의 크고 작은 해수욕장들이 포도알 열리듯 매달려 있다. 지도를 펼쳐 태안의 해변 이름만 읽어 내려가는 것만도 재미있다. 꾸지나무골, 사목, 음포, 먼동, 어은돌, 파도리… 마치 고전을 뒤적이다 어여쁜 옛말들을 발견하는 느낌이다.
이 예쁜 이름의 해안을 잇는 걷는 길이 조성돼 있다. 화려한 풍경에 비해 그 이름은 밋밋하기 그지없는 ‘태안 해변길’이다. 태안의 북쪽 학암포에서 안면도 최남단 영목항까지 바다를 끼고 이어진다. 전체 7코스 중 노을길(5코스), 샛별길(6코스), 바람길(7코스)이 안면도를 지난다. 뭍에서 섬이 된 역사를 품은 땅을 지난다.
안면도의 끝자락에 있는 영목항. 겉모습은 허름하지만 서해 물고기들의 산란지인 천수만의 길목을 지키고 선 풍요로운 항구다. 이 영목항에서 7코스 바람길(16㎞)이 시작된다. 이 길은 그냥 바람만 맞아도 기분 좋을 것 같은 바람아래해변을 지나 장돌해변, 장삼해변 등을 거쳐 황포까지 이어진다. 바람아래해변에선 바로 앞 장고도 고대도 군관도 등의 섬무리들이 펼쳐놓은 아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바람길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최근 안면도로 사진작가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운여해변이다. 소나무가 가지런히 이어진 운여해변의 방파제 풍경이 이국적이다. 일몰 때 방파제 너머로 밀려든 바닷물이 고여 호수를 이루는데 그 위로 빨간 석양이 물든다.
황포에서 시작되는 6코스 샛별길(13㎞)은 곧바로 국사봉 자락 벼랑 위로 올라 쌀썩은여 전망대에 닿는다. 조세선의 침몰이 잦았다던 갯바위다. 이곳에 배가 좌초한 건 거친 바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곡을 거두고 옮기는 과정에서 벼슬아치들이 너나없이 빼돌렸고, 이곳에 이를 땐 이미 배가 텅 비어 일부러 배를 침몰시키곤 조정에 거짓 보고를 했다고 전해진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망재 등 주변 섬풍경이 아늑하다.
길은 샛별해변의 긴 백사장을 지나 안면도에서 가장 이름난 바닷가인 꽃지해변에 이른다. 할미 할아비 바위가 우뚝 서있는 백사장이다. 밀물 때보단 썰물 때, 할미 할아비 바위로 자갈길이 이어질 때 풍경의 감동이 배가 된다.
석양이 유독 아름다운 꽃지에서 다시 5코스 노을길(12㎞)이 이어진다. 풍성한 해산물이 쏟아지는 방포항을 지나 두에기, 밧개, 두여, 기지포, 삼봉 해변 등을 거쳐 안면도의 북쪽 끝자락 백사장항에 닿는다. 백사장항 건너편은 독특한 이름의 드르니항이다. ‘들르다’란 말에서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이 두 포구 사이엔 해상보도교가 놓여있다. 길이 240m에 달하는 거대한 다리는 2013년 조성됐다. 높은 다리에서 바다 위로 걷는 맛이 짜릿하다. 바닷바람도 더욱 강렬하다. 다리 위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해넘이도 일품이다. 이 다리의 이름은 ‘대하랑 꽃게랑’. 곧 가을이 깊어지면 안면도 식당의 수족관들엔 대하와 꽃게가 득시글거릴 게다.
태안=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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