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얘기가 궁금해?” 남장여자가 등장해 실체를 모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현재를 사는 여인이 1,000년 전 과거로 넘어가 남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얼핏 들어도 다음 얘기가 궁금하지 않다. 이미 많은 드라마에서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남장여자’와 ‘타임슬립’ 설정 아닌가.
퓨전사극으로 월화 동시간대 방영되는 KBS2 ‘구르미 그린 달빛’(‘구르미’)과 SBS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달의 연인’)는 이 진부하고 식상한 코드를 내세워 경쟁 중이다. 그나마 ‘구르미’가 5일 방송에서 시청률 16.9%(이하 TNMS 제공)로 ‘달의 연인’(6.1%)과 비교해 체면을 살리고 있지만, MBC ‘해를 품은 달’, KBS ‘성균관 스캔들’을 답습한 흔적은 지울 수 없다.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든 이유다. ‘달의 연인’는 8명의 황자를 불러놓고 인물이나 관계 설명이 하나 없다. 그저 한 명의 여인을 두고 3각 관계를 넘어 7각 관계까지 형성될 것으로 보여 한숨부터 나온다. 두 퓨전사극의 문제점을 짚어봤다.
1. 식상한 ‘구르미…’
남장 여자ㆍ정약용役 안내상
‘성균관 스캔들’ 복제품 같아
호연으로 그나마 시청률 선방
2. 뜬금없는 ‘달의 연인’
납득 어려운 타임슬립 설정
‘황자’ 낯설고 관계 몰입 안돼
중국 수출용 드라마의 한계
3. 현시대로는 갈등 구도 어려워
재탕삼탕 퓨전사극 계속 나와
강은영 기자(강)=“둘 다 퓨전사극인데 너무 가볍다. 일단 ‘구르미’는 ‘해를 품은 달’과 ‘성균관 스캔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고, ‘달의 연인’도 동명의 중국 소설과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고려시대라고는 하지만 붕 떠 있는 느낌이다. 두 드라마 모두 가상의 시대라서 역사를 바탕으로 시청하기엔 괴리감이 너무 크다.”
김표향 기자(김)=“특히 ‘구르미’는 ‘성균관 스캔들’의 복사품 같더라. 남장여자 설정도 모자라 배우 안내상이 정약용으로 출연한 것도 똑같아 헷갈릴 정도다.”
조아름기자(조)=“대놓고 ‘가볍게 볼 만하다’는 의도에는 부합한 것 같다. 하지만 ‘구르미’의 남장여자나 ‘달의 연인’의 타임슬립 같은 설정은 퓨전사극의 공식처럼 너무도 진부해서 오히려 몰입을 방해할 정도다.”
양승준 기자(양)=“남장여자나 타임슬립도 얼마든지 다른 접근을 할 수 있는데 그 점이 아쉽다. ‘달의 연인’ 속 아이유가 물에 빠져서 1,000년 전 고려시대로 가는 과정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고려로 가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어 황당했다.”
강=“2008년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SBS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정 하에 남장여자를 등장시켜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로 퓨전사극의 필수조건은 남장여자가 된 듯하다.”
양=“퓨전사극이 답보 상태라고 본다. 최근 영화계에선 ‘덕혜옹주’ 등 역사 콘텐츠가 잘 팔리고 있긴 하지만 제작비 문제 때문인지 드라마 시장에서는 타임슬립 등 소재가 제한적이다.”
김=“tvN ‘인현왕후의 남자’나 웹드라마 ‘퐁당퐁당 러브’는 같은 타임슬립이라도 다르게 와 닿는다. ‘인현왕후의 남자’ 속 여주인공은 사극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무명배우였고,‘퐁당퐁당 러브’에선 고3 수포자(수학포기자)였다. 그러나 ‘달의 연인’ 아이유는 뚜렷한 특색이 없어 더 와 닿지 않는다.”
양=“특히 ‘달의 연인’은 몰입할 만한 포인트를 못 찾겠더라. 너무 낯설어서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황자’라는 단어도 생소하고. 황자가 8명이나 등장하는데다 관계도 복잡해 초반을 놓친 시청자들은 중간에 감정 이입을 하기 힘들다.
김=“인물 설명이 친절한 것도 아니다. 1회부터 황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복잡하기만 할 뿐 몰입이 안 되더라. 옷을 벗고 상반신을 드러낸 왕자들만 떼로 나오는데 얄팍한 눈요기라고 생각돼 거부감이 들었다.”
조=“‘구르미’가 드라마적 몰입도를 높인 건 평면적인 인물관계 덕이다. 세자인 박보검과 남장여자 내시 김유정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하지만 결말이 예측이 되더라. 박보검이 요절한 효명세자를 모델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진부하게 보인다.”
김=“관계뿐만 아니라 캐릭터도 평면적이다. ‘달의 연인’에서 이준기와 강하늘의 라이벌 구도는 1990년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남자주인공들의 구성이다. 요즘 사극에선 여주인공도 입체적인 성격을 띠는데 아이유는 시작부터 ‘민폐’ 캐릭터다.”
강=“남장여자 컨셉트의 김유정도 뻔하지만 조선시대의 ‘연애전문 카운슬러’다. 1회 카메오로 출연한 차태현과 연기를 할 때 남장을 하고는 유머러스하고 다부지며 당찬 연기를 선보였다. 식상한 설정 속에 캐릭터에 색깔을 입히니 그럴싸해 보이더라.”
양=“극중 캐릭터만 보면 ‘구르미’는 식상하고, ‘달의 연인’은 뜬금없다. 이야기 요소에 큰 매력이 없기 때문에 시청자를 유도하는 건 결국 남녀주인공이 얼마나 캐릭터를 잘 소화하느냐다. 그런 면에서 박보검과 김유정의 ‘케미’가 잘 살고 있어 ‘구르미’가 시청률이 높은 것이다.”
강=“박보검에게서 ‘해품달’의 김수현을 봤다.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더라. 4회 방송에서 왕 역의 김승수와 대리청정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얘기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김=“‘달의 연인’은 청춘스타들이 많이 나오는데도 서로 호흡이 잘 맞지 않는 듯한 분위기다. 다들 따로 겉돈다. 남자 8명에 여자 1명이라는 구도여서 여주인공의 역할이 중요한데 아이유가 그 역할을 못해주는 듯하다. 김유정의 힘이 크다는 걸 새삼 느낀다.”
강=“‘달의 연인’은 중국 원작을 바탕으로 한 ‘중국 수출용’ 드라마라 그런지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고증을 거친 정통사극은 중국에 팔기 어려우니 아예 중국 것을 리메이크 한 게 문제인 듯하다. 방송사 입장에선 쉽게 가려다가 뒤통수 맞은 격이다. 중국드라마도, 한국드라마도 아닌 데서 느끼는 불편함은 시청률이 말해준다.”
김=“그런데도 퓨전사극이 자꾸 나오는 건 현대 배경으로는 극적인 장치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분제도 등이 있던 과거가 갈등을 최고조로 하기에 효과적이다. ‘해품달’에서 보여준 무속신앙도 현대극에 넣으면 임성한 작가의 ‘엽기’ 드라마가 되지만, 시대극이니 묵인된다.”
강=“정통사극은 제작비도 많이 들지만 역사적 고증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원 주연의 MBC ‘기황후’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에도 역사왜곡으로 혹평을 받았다. 그래서 점차 로맨스를 중심으로 한 퓨전사극이 많아지고 내용도 가벼워지는 추세인 듯하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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