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용으로 30~90% 원액 수입
8~42%로 희석 시중에 판매
“치명적 수준… 일반제품은 6%대”
수입 전 허가ㆍ단속 등 규제 없어
살인 등 범죄에 악용될 우려도
허용치의 20배가 넘는 ‘고농도 니코틴’ 액상을 외국에서 불법으로 들여 온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이 유통한 니코틴액은 성인 남성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독성이 강했지만 농도 및 품질에 대한 수입허가 규제가 없어 범죄 악용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중국, 미국 등에서 니코틴 원액을 수입해 전자담배용 니코틴 용액을 불법 제조ㆍ유통ㆍ판매한 혐의(화학물질관리법)로 전자담배 유통업체 대표 김모(54)씨 등 8명을 검거했다고 5일 밝혔다.
김씨 일당은 2015년 1월 담뱃값 인상으로 전자담배를 찾는 수요가 폭증할 조짐을 보이자 2014년 7월부터 2년 간 농도가 각각 30~90%인 값싼 니코틴 274ℓ를 중국 등에서 수입했다. 이후 니코틴 용액과 프로필렌글리콜, 글리세린을 섞어 8~42%로 농도를 낮춘 뒤 병(1~2㎖)에 담아 개당 1,500~5,000원을 받는 등 총 3억8,625만원어치를 시중 전자담배 판매점에 팔아 치운 것으로 조사됐다. 프로필렌글리콜은 담배를 피울 때 연기 효과를 나게 하고 글리세린은 연기의 양을 많게 하는 물질로 전자담배 제조 시 니코틴과 섞어 쓴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은 전자담배 이용자 중 고농도 니코틴을 찾는 소비자를 노려 ‘맞춤형 상품’을 제조했다”며 “농도가 세질수록 마진율도 높아져 불법을 감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김씨 등이 판매한 니코틴 농도가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신경전달물질인 니코틴이 몸 속으로 들어오면 신경을 자극시키고 혈관을 수축시켜 호흡과 심장박동에 영향을 준다. 익명을 요구한 전자담배 유통업체 관계자는 “전자담배용 니코틴 농도가 6%, 즉 1㎖ 용기에 60㎎만 들어 있어도 치사량으로 판단한다”며 “피의자들이 유통한 니코틴액은 농도가 훨씬 높아 희석하지 않고 흡입할 경우 호흡이 정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의학 전문가들도 사망 여부를 가르는 니코틴 유입량 기준을 35∼65㎎(60㎏ 성인남성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이 뿐 아니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이들이 유통한 니코틴액에는 톨루엔 아세트할데히드 크렌실 등 중추신경장애와 암을 유발하는 유해화학물질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김씨 일당이 니코틴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화학물질관리법상 농도 2%를 넘는 니코틴액을 판매하려면 환경부로부터 유해화학물질 영업 허가를 받고 구매자의 인적사항을 파악해야 하지만 단속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피의자들처럼 니코틴을 수입단가가 낮은 살충제 등 ‘공업용’으로 들여온 뒤 전자담배 원료로 둔갑시켜도 규제할 방법 역시 전무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독성이 강한 니코틴 원액이 강력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무색ㆍ무취한 니코틴액은 물과 구별되지 않아 고농도 원액은 충분히 범죄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올해 4월 경기 남양주시에서는 40대 여성이 50대 남편에게 치사량의 니코틴을 탄 음료를 몰래 먹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상희 호서대 바이오응용독성학과 교수는 “고농도 니코틴 원액은 극소량이라도 죽음을 부를 수 있는 만큼 정부 당국이 전자담배에 대한 관리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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