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으로 친구와 쉽게 빠져
중고교생 5% 중독 문제-위험군
학교 밖 청소년은 20% 가까워
자금 모으려 범죄 저지르기도
“청소년기는 도박 예방 골든타임”
‘우리 애가 설마’ 생각 버려야
웹툰 ‘외모지상주의’에 등장하는 고교생 지호는 지인 추천으로 우연히 시작한 ‘홀짝 게임’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불법 도박사이트 관리자가 결과를 조작해 점점 많은 돈을 잃은 지호는 결국 3,000만원의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학원비라 속이고 엄마에게서 받아낸 돈, 친구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훔친 돈 등을 갚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 만회는커녕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렵게 구한 사채마저 단 몇 시간 만에 판돈으로 몽땅 날렸다.
지호의 이야기는 단지 웹툰 속 가상의 비극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수많은 지호들이 불법 도박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가 지난해 8월부터 3개월 간 전국 중고교생(고교 3년생 제외) 1만4,011명을 조사한 결과, 전체 학생(294만여명) 중 3만여명(1.1%)이 위험 수위 이상의 도박 증세를 보이는 문제군(도박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4일 밝혔다. 특히 학교 밖 청소년의 경우 재학 중인 학생들(5.1%)보다 문제군, 위험군(도박에 몰입한 상태)으로 분류된 학생 비율이 20%로 훨씬 높았다. 청소년들 사이에 도박이 또래 놀이문화로 오인되면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도박 악령이 성인뿐 아니라 10대까지 괴롭히게 된 것은 진입 문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중고교생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라인 도박사이트에 접속하는 데다, 게임 방식도 점차 단순해져 어렵지 않게 도박 패턴을 익힐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끈 사다리, 홀짝 게임 등이 대표적이다. 경찰 관계자는 “복잡하게 두뇌 싸움을 할 필요가 없이 단 몇 분 만에 승부를 보는 구조라 어린 학생들이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먼저 도박에 입문한 청소년이 승률이나 수익을 과시하면 모방 심리가 강한 주변 학생들이 쉽게 따라 하는 점도 청소년 도박이 급속히 퍼진 원인으로 꼽힌다.
청소년 도박은 단순히 중독 수준에 그치지 않고 2차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더욱 우려된다. 10대는 경제 능력이 한정된 탓에 도박 자금을 마련하려 서로 돈을 빌려주거나 인터넷 중고거래 사기와 도박사이트 운영을 공모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올해 2월 전북 남원에서 중고물품 거래 애플리케이션에 최신 아이폰 판매 글을 올린 뒤 450여만원을 가로챈 A(19)군도 검거 당시 도박에 탐닉한 상태였다.
어린 나이에 ‘한탕주의’에 젖어 드는 것도 문제다. 이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겠다는 관념이 희박해 성인이 된 후에도 도박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크다. 실제 도박문제 실태조사에서 문제ㆍ위험군에 속한 청소년들 가운데 ‘성인이 된 후 사행산업에 참여하겠다’는 응답률은 각각 50.0%, 45.2%로 절반에 육박했다. 도박 치유 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는 고교 3학년 김모(18)군은 “굳이 고생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돈 벌이가 가능해 졸업 후 도박 사이트를 열 계획”이라고 했다.
청소년 도박의 심각성은 나날이 높아가는데, 애들 문제로 치부하는 바람에 예방 교육은 뒷전으로 밀리거나 아예 시행되지 않고 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가 2013년 8월 개소한 이후 예방 및 치유ㆍ재활 교육을 병행하고 있지만 상담사(80여명)의 80%가 사후 치료에 매달려 있다. 예방 교육은 당장 결과가 나타나기 어려워 교육 당국과의 협조도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다. 전영민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치유재활부장은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학부모와 교사의 현실 부정 때문에 도박 예방 효과가 가장 큰 청소년기의 ‘골든 타임’을 놓치고 있다”며 “도박 중독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만큼 청소년을 위한 예방 프로그램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