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으로 튼실하지 못한 데다 편식까지 심했던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다. 친구들이 무쇠라도 때려잡을 듯 뻗치는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청소년기에도 길 가다 혹은 공부하다 픽픽 쓰러졌으니, 그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용케 직장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에도 나을 건 없었다. 아슬아슬 버티며 얼마간 무리를 하면 호된 대가를 치렀다.
그날도 그랬다. 며칠간의 야근과 밤샘근무 뒤 탈진한 나는 회사를 결근하고 누워 있었다. 결혼한 언니 집에 얹혀살 때였다. 언니 부부는 출근하고 큰조카는 유치원에 갔다. 집에는 앓아누운 나와, 아픈 이모를 돌봐야 한다며 놀이방에 가지 않은 네 살짜리 조카뿐이었다. 한나절 쉬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영 기운이 돌지 않았다. 나는 도리 없이 누워만 있었고 어린 조카는 물수건을 들고 와 내 얼굴과 손을 닦았다. 잠시 후 분주하게 움직이던 조카가 내 입에 플라스틱 숟가락을 넣어주었다. 달달한 시럽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모, 이거 먹으면 안 아플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다.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과 링거병, 언니 내외와 조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린 조카는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굵은 눈물만 뚝뚝 떨구는 모습이 너무 가여웠다. 상황을 짐작한 내가 “덕분에 푹 잤다”고 웃으며 꼭 안아주었을 때 아이는 억눌렀던 두려움과 죄책감을 터뜨리며 그제야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다. “미안해, 이모.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조카가 내 입에 넣어준 것은 유아용 해열제였다. 기침하고 열이 오를 때마다 어른들이 조카에게 먹이던 달달한 시럽 한 스푼이 탈진한 내 몸으로 들어가 쇼크를 유발했다. 제가 준 약을 먹은 후 이상하게 축 늘어져 버린 이모를 보고 놀란 아이가 엄마에게 전화했다지만, 어른들이 오기 전까지 그 어린 것이 홀로 감당했을 공포를 생각하니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던지….
그깟 유아용 해열제 한 스푼에 나가떨어져 버린 수치를 겪은 후 나는 결심을 했다. 허약한 육체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운동도 조금 하고, 무엇보다 녹용 듬뿍 넣은 보약을 봄가을로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보약의 효험인지 살짝 늘어난 근육 덕인지, 이후 속절없이 고꾸라지는 수모를 겪지 않고 나이를 먹었고 그때의 일도 먼 추억 일부로 남았다.
20여 년 전 이야기를 불쑥 꺼낸 건, 그 시절의 내 나이로 훌쩍 자란 조카였다. 보기 드물게 사려 깊은 나의 조카는 그때 그 일이 자기를 각성시킨 결정적 사건 중 하나였다고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옳은 방법으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그때 본능처럼 터득했다고 했다. 나의 의도가 아무리 선량하더라도, 한순간의 부주의나 무지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숙고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했다.
특이한 것은, 그 사건을 허약한 육체가 불러온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보약 먹기에 열중했던 나와 달리 조카는 약품이 유발하는 중차대한 위험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가습기 살균제 사고나 약품 부작용으로 인한 인명피해 보도를 접할 때마다 아이는 아찔한 절망감으로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신은 큰 사고를 면했지만 복구할 수 없는 후회와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미칠 것 같다고 했다.
그래. 나는 별일 없이 살고 있다만…, 너는 많이 힘들었구나. 머쓱한 얼굴로 스스로의 아둔함을 자책하는 나에게 조카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해외에서 출간된 이 분야 신간서적 리스트였다. 헤어져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종이에 적힌 제목들을 꼼꼼히 살폈다. 한 권이라도 번역해 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내가 할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니, 미안하던 마음까지 슬며시 풀렸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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