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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칼럼] 억울한 민초들의 나라

입력
2016.09.0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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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뇌출혈로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게 되신 날은 횡포에 가까운 미군과의 계약으로 인한 손해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해 파산 신청을 하려고 결심하셨던 시점이었다. 돌아가신 후 살펴보니, 이익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개인 재산으로 직원들의 월급을 주고 계셨다. 100명 남짓의 직원을 고용했던 나름대로 탄탄했던 회사였지만, 남긴 유산은 잔액 몇백만원의 생활비통장, 한 달에 7만원씩 부었던 종신 보험금, 그리고 십수억원의 빚이었다. 빚더미를 물려받은 남동생이 회사를 다시 살려 나가면서 억울한 마음에 미군에게 사과를 받는 일을 추진했지만, 끝내 보상을 받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께서 미군에 공헌한 내용이 적힌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경상도에 태어나 6ㆍ25 학도병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미국과 보수 정권에 대한 무한신뢰를 하고 계시다가 결국 배신을 당하셨던 아버지의 삶은 그나마 이 땅의 다른 억울한 죽음들에 비하면 참 많이 나은지도 모르겠다.

2015년 11월 14일 이후 뇌사 상태로 병원에 있는 늙은 농민 백남기씨는 어떤가. 물대포를 직통으로 머리에 맞고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그가 왜 거기에 서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그 가족들이 피눈물 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정부는 물론 대부분 언론조차 관심이 없다. 소박한 시골 농민의 생활이 가능했다면 추운 겨울밤, 낯선 서울에 올라와 차가운 물대포 앞에 칠순을 앞에 둔 노인이 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2009년 겨울, 용산 철거민 참사로 목숨을 잃거나 생계수단을 잃어버렸던 소상인들이나 세입자들도 그렇다. 추운 날에 몸 누이고 병원비 낼 정도의 삶의 터전만 최소한 보장받았어도, 그들이 무슨 흉악한 테러리스트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나라와 투쟁했겠는가. 세월호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또 어떤가. 사랑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 최소한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조사만 이루어졌어도, 공권력에 무시와 협박이나 당하면서, 무지한 이웃들에게 조롱당하지만 않았어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문책만 받았어도, 이미 삼년상을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지금까지 단식하며 과거에 붙잡힌 괴로운 시간 속에 살지는 않을 것이다.

20여년 전 음주운전 사실을 속이고 경찰청장이 되었다는 새 경찰청장의 이력으로 연일 언론이 시끄러웠지만, 정작 백남기 노인이 아직 깨어나지 못하게 된 사건의 책임자였던 전임 경찰청장이 진심 어린 사과 없이 끝까지 임기를 마친 일에 대해 언급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공권력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데, 보상은커녕 진정한 사과와 후회하는 마음조차 아무도 보이지 않고 버티고 있다면 그게 정말 나라일까. 상대가 총기를 들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 정당방위 차원에서 경찰이 총을 쏘아도 폭동이나 대규모 항의집회를 하는 미국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일까. 용서하는 마음의 도량이 넓은 탓일까. 아니면 공권력의 횡포와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나와 우리 가족만은 비켜 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무한 긍정심리 때문일까.

죄 없는 국민이 억울하게 다치거나 죽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과거는 그뿐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단돈 1억원의 보상으로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일본에 대한 분노가 깊이 일지만, 한편으로는 정부의 비호 아래 오랜 세월 대규모의 성매매 기지촌이 있었던 사실에 대해 같은 의사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에 대한 부끄러운 회한도 밀려온다. 정부와 의료진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해 항생제를 어린 여성들의 입에 밀어 넣어 주면서까지 다시 성폭력의 현장으로 그들을 내몰았고, 정부는 그들을 감시하는 포주나 업주로부터 많은 세금도 죄의식 없이 걷어갔다. 눈감아 주는 대가로 돈을 챙긴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숫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과문한 탓인지, 한국과 월남의 기지촌 주변 성매매 여성들이 사과와 보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은 바 없다. 일본의 원폭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언급되고 있지만, 월남에 가서 목숨을 담보로 번 월급의 90%는 모두 군사 독재 정권에 고스란히 빼앗긴 채, 고엽제 후유증만 앓게 된 월남전 참전 용사들의 고생스런 삶 앞에 무력감만 들었던 순간부터 생각나 가슴이 답답하다. 어쩌면 우리가 일본의 보수 정부에 번번이 밀리는 이유가 이와 같은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영화 “덕혜 옹주”의 후반, 친일파 관료가 미 군정에서 다시 승승장구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일제와 독재정권에 동참했던 이른바 명문(?) 가문들은 조상 잘 만난 덕으로 아낌없이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고 있고,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미련한(?) 가문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가난에 시달리고 살아야 했던 과거의 표상이 아닐까. 90세가 넘은 나치 전범도 끝까지 찾아내서 죄를 짚고 넘어가고,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끊임없이 사과하고 있는 독일이 그냥 선진국이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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