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30일
1957년 8월 30일, 강성병이라는 22세 청년이 경주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 이강석인데…”라고 말한 것으로 이른바 ‘가짜 이강석’ 사건이 시작됐다. 대구 출신인 그는 대학 입시에 떨어진 뒤 서울 등지를 떠돌던 실업자였고, 20세 이강석은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의 장남으로 그 해 3월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의 양자가 된, ‘제1공화국 황태자’같은 권력자였다.
이강석이 육사 생도이긴 했으나 공무원은 아니었으니 그를 사칭한 게 곧장 죄가 되진 않았겠지만, 그는 아버지(이기붕은 당시 민의원 의장)의 지시로 수해 현장조사와 공직자 비리 사찰을 나왔다고, 암행사찰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사기를 쳤다. 태풍 아그네스가 전국을 덮친 직후였다.
그의 사칭 행각은 영천과 안동 대구로 이어졌다. 시장 서장 등 공직자들은 그를 ‘영감(令監)’ ‘귀하신 몸’따위로 극존대하며 말 그대로 칙사 대접했다. 최고급 숙소에 관광, 갖은 선물과 여비…. 승진을 청탁한 서장도 있었고, 지프차로 달려와 길 위에서 굽실거린 군 장성도 있었다. 지역 유지들도 거액의 ‘수재의연금’을 갹출해 그에게 떠 안겼다. 그의 사기는 사흘째인 9월 1일 경북도지사 관사에서, 이강석을 알던 도지사의 아들과 대면하면서 들통났다.
사기와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된 강성병은 재판에서 징역 10월 형을 선고 받았다. 공판에서 그는 “신문을 봤더니 서울 명동경찰서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때리고 행패를 부려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강석이라면 무엇이든 통하는 세상이라고 믿었다”고 진술했다. 경향신문 기사가 가장 돋보였다. 공판 전 기자들이 심경을 묻자 그가 “전형적인 ‘아프레게르’형적인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고 경향신문(그 해 10월 3일자)은 전했다. “권력이란 정말로 그다지도 좋은 것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그저 놀랄 뿐이었다” “내가 그와 같은 사기 행동을 한 것은 경찰의 부패상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도 동기 중의 하나였다.(…) 미국 ‘허리욷’같으면 내 연기에 대해서 육십만불 정도의 연기료를 받을 수 있을 터인데 나는 연기상 대신에 형을 받게 되었다.”
기자가 그의 말을 고스란히 옮긴 것 같진 않지만, 그 사건이 대중적으로 어떻게 소비됐는지는 ‘아프레게르’적인 어조로 충실히 전하고 있다. 과연 그의 연기력은 탁월했고, 그가 펼친 부정한 권력의 드라마는 이후의 그 어떤 몰래 카메라보다 통렬했다. 출옥 후 그의 삶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63년 자살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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