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와 늑대, 아슬아슬한 평화 ‘손에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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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와 늑대, 아슬아슬한 평화 ‘손에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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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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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폭풍우를 피해 산기슭 오두막으로 염소와 늑대가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우정을 나눈 그들은 다음엔 대낮에 만나자고 약속한다. 아이세움 제공

폭풍우 치는 밤에

기무라 유이치 글, 아베 히로시 그림ㆍ김정화 옮김

아이세움 발행ㆍ48쪽ㆍ9,000원

그간의 폭염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후일담을 나누게 되니 이제 어지간히 여름의 터널을 빠져 나온 듯하다. 시시때때 농작물에 물 대느라 고생한 농부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선풍기 두 대로 버틸 수 없어 책상을 떠나 집필 자료며 회의 자료 보따리를 이고 지고 손님 뜸한 카페를 찾아 떠도느라 나름대로 전쟁을 치렀다. 가까스로 쟁취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회의를 하고 노트북 작업을 하면서, 홀로 일할 때에는 유튜브에서 찾은 폭우 소리를 이어폰으로 듣고 여럿이 회의할 때에는 폭풍우가 내리치는 그림책을 나직나직 함께 읽기도 했다.

‘쏴쏴,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물을 퍼붓는 것처럼 비가 내렸습니다’로 시작되는 ‘폭풍우 치는 밤에’의 캄캄한 첫 장면은 에어컨 바람으로 연명하는 폭염 속 도시내기들을 단숨에 비바람 몰아치는 한밤중 산기슭으로 데려간다. 그림 작가 아베 히로시의 거침없는 선이 사선으로 그어댄 굵고 진한 빗줄기 덕분이고, 장면장면 아슬아슬 으스스하면서도 웃음 터지게 만드는 기무라 유이치의 재담 덕분이다. 산기슭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외딴 오두막으로, 폭우를 피해 하얀 염소 하나가 들어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니, 하얀 염소마저 지워지는 오두막 속 어둠 속으로 늑대 하나가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 늑대가 다친 발목을 부축하느라 짚은 나무 지팡이 소리를 염소가 오해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염소는 누군가 오두막 속으로 들어오는 기척에 겁을 먹지만, ‘또각 직, 또각 직’ 기묘한 발굽 소리를 내는 그 존재가 적어도 늑대는 아니라고 믿는다. 늑대 발은 그런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 발을 다쳐 의기소침한 늑대 또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오두막 속의 보이지 않는 선착자가 텃세를 하지 않을뿐더러, 자기도 이제 막 들어왔다는 둥 함께 있게 되어 마음이 한결 놓인다는 둥 상냥하게 굴자 포식 본능을 잊는다. 무엇보다도 시원찮은 다리를 절름거리며 폭풍우 속을 헤매느라 후각이 떨어져 그토록 탐식하는 염소 냄새를 못 알아챈다. 그 덕분에 아슬아슬한 평화가 유지된다.

이제 염소와 늑대는 어둠 속에서 그저 폭풍우가 그칠 때를 기다리는 웅크린 존재들이다. 먹이와 서식지에 대한 동문서답을 주고받으면서 둘은 ‘빨리 뛰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동일한 생존 지침에 반가워한다. 그런 만큼 서로의 정체를 궁금해 하지만 포식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다. 폭풍우가 멎은 뒤 오두막을 떠나면서 둘은 서로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다음날 대낮의 만남을 기약한다. ‘폭풍우 치는 밤에’를 암호로 정해두고!

자연이 연출한 이 절묘한 장면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 삶의 절망과 희망, 타자와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메타포로 다가오며 오싹하고도 유머러스한 냉기를 끼얹는다. 25년간 동물 사육사로 일하면서 동물과 교감해온 아베 히로시의 스크래치 기법 그림은 천둥과 번개 장면을 위한 선택일까? 이 묵직하고도 경쾌한 이야기는 8권까지 후속편이 나왔지만, 이 한 권만으로도 더없이 완벽하다. 폭염을 이겨낸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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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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