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막장에서 보낸 사람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뛰는 (사)한국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 근로자 산재보상을 위한 전문가상담 추진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진폐법 제정과 개정작업을 위한 공청회 패널로 참여하면서부터 30년의 세월을 광부들의 직업병 관리와 함께 해온 한국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 박용일 고문. “억만금보다 광부들이 재해보상을 받게 해주어 고맙다고 건네주는 강원도옥수수 한 자루가 더 없이 가치있고 감사하다”는 그를 통해 탄광촌 삶의 현장들을 들여다본다.<편집註>
◇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에 모인 사람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탄광도시인 강원도 태백.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모여든 광부들과 가족들, 그로 인한 인구증가로 인해 밤에도 불야성을 이룰 만큼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많이 한산해졌다.
태백시 인구는 금년 6월말 기준으로 4만7,345명. 이는 석탄산업이 활기를 띠던 1987년의 12만208명에 비해 60.6%나 줄어든 수치다.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조치 이후 열 명 중 여섯 명은 태백을 떠났다는 말.
그러나 지난 8월16일 낮,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심심치 않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 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바로 태백시 태백로 1130번지, 태백진폐복지회관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이하 ‘협회’)다.
이곳은 탄광에서 생긴 업무상 질병에 대한 산재보상 여부를 상담 받고자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삶의 애환을 털어놓는 ‘재활의 장소’다. 많을 때는 하루에 20~30명, 적을 때는 10여 명의 광부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고 협회를 이끌고 있는 황상덕 회장(65)은 밝혔다.
“지금은 모노레일 위로 탄과 작업 기계들을 밀고 다닌다지만, 과거에는 무거워도 어깨에 지고 다니면서 작업을 했지요.”
어깨와 팔꿈치의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던 김영규씨(59. 태백시 장성동)의 회상이다. 그가 1986년부터 2014년까지 28년 동안 채탄작업을 위해 메고 다녔다는 것은 30~40kg에이르는 착암기.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기듯이 막장 끝을 뚫고 넓히며 석탄을 캐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쇠로 만든 기계가 아니었다. 살붙이 인간이었던 것.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어둡고 긴 갱도터널 속에서 살아야했던 지난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이제는 “손을 들면 어깨에 뿌득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양 어깨가 아프다”고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른쪽 무릎도 걷기 힘들다. 지하 막장에서 착암기로 석탄구멍 뚫기 작업할 때, 착암기의 전진을 위해 뒤를 지탱해야 했던 힘은 갱도 바닥을 지지하고 있던 그의 오른쪽 무릎이었던 것.
그래서 그의 다리에 집중된 착암기 반작용의 압력은 28년의 세월동안 조금씩 그의 오른쪽 무릎으로 덮쳐왔다. 여기에 설성가상의 압력이 더해진 것은 착암기와 드릴 작동시에 발생하는 격심한 진동. 자갈길 위를 달리는 트럭의 흔들림 같은 진동이 그의 어깨와 다리를 내내 뒤흔들어놓은 것이다.
◇탄광 ‘산업전사’에 의지해야 했던 한국의 에너지
이날 김용규씨 상담을 담당한 협회 박용일고문(58. 교육 및 법률자문역)은 “정밀한 진단은 종합병원의 검사 결과 나타나겠지만, 현재로서는 착암기에 의한 근골격계 이상증후군와 진동증후군에 의한 말초신경 손상이 염려된다”는 견해다.
상담을 받는 재해환자 중에는 본인이 아닌 가족들도 많다. 광부가 이미 직업병으로 사망을 했거나,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치료 중인 재가환자의 경우다.
그런 가족 중의 한 사람인 성명옥씨(62.여. 태백시 화전동)는 지난 4월에 사망한 남편 권태식씨(64)가 ‘광부’임을 입증하는 서류 한 장을 들고 왔다. 큰 아들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사본. 현재로서는 남편이 탄광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다.
그녀는 8월초 1차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남편이 광부로서 ‘10년 이상’ 탄광에서 근무했음을 입증하는 근거서류를 들고 오지 못했다.
남편이 1976년 태백으로 오면서부터 근무했던 함태광업소는 1993년 폐광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 남편은 이후 여러 군소 탄광업소들을 전전했지만 그 광업소들도 이미 문을 닫아버렸고, 당시 일당제로 임금을 받던 하청업체 근무경력으로는 남편의 ‘소득증명원’ 등 근무경력 서류를 발급받을 길이 막연했다.
이때 박용일 고문이 권유했던 것이 자녀들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열람. “혹시 생활기록부에 아버지 직업이 광부라 적혀 있을지도 모르니 학교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다.
◇아들 생활기록부에 남기고 간 남편의 유산
그 말에 큰 아들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확인해본 결과 ‘천만다행’으로 아버지의 직업란에 ‘광부’라고 버젓이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 황상덕 회장은 “당시 광산촌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광부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저 ‘회사원’이라고 적어내던 시절이었는데, 성명옥씨 큰아들이 사실대로 말한 것이 진폐증 보상받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회사원’이라고만 하면 광부라는 구체적 사실 입증이 어렵다는 것.
남편과 성명옥씨가 42년 전에 세살 큰아들을 걸리고, 돌을 갓 지난 둘째 아들을 업고 경북 봉화에서 태백 탄광촌으로 들어온 이후 40년간 남편은 오직 탄광 막장에서만 살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남편은 늘 가래가 끓었고 숨이 가빴다. 하지만 석탄가루가 폐를 쭈그러뜨리는 진폐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탄을 캐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남편은 네 달 전 64세의 나이로 큰아들 곁으로 갔다. 아버지 직업을 ‘광부’라고 적었던 그 큰아들은 이미 5년 전 세상을 뜬 뒤였다.
성명옥씨는 현재 혼자 살고 있는 처지. 협회를 찾아 상담에 나선 것은 주변에서 “고인의 진폐증이 직업병으로 입증되면 정부에서 연금혜택 등 보상을 해주기 때문에 그 연금으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다”고 귀띔해준 때문.
이들 외에도 이날 박용일 고문과 상담한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소득증명원’ 등 탄광 근무경력 서류를 발급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광부들도 있었다.
그럴 경우 탄광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로 인보증을 세워야 하나 “보증을 서려면 인감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을 의식해 선뜻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보증에 대한 사회 일반적인 피해의식 때문이라는 것.
2006년3월 설립된 한국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에는 현재 전국에서 3천20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주로 회원들의 권익증진을 위한 의료 복지 등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직 이후에 나타나는 진폐증과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레이노드증후군(신체 끝부분 혈관수축으로 혈액순환장애를 일으키는 병), 소음성난청 등 광부들의 업무상 질병의 근골격계와 신경계 진단과 치료, 보상 등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채탄용 장화로 막걸리 마신 산재전문가
황상덕 회장은 197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40년간 함태광업소, 태백광업소 등에서 근무한 광부 출신.
평생을 갱도 속에서 살던 경험을 살려 광부들의 잔여인생에서 검은 석탄가루가 제거되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지난해부터는 10년이상 장기근속자 회원들의 COPD검사에 나서는 등 질병 급수별로 연금이나 재해위로금, 휴업급여 등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교육 및 법률자문역을 맡고 있는 박용일 고문과 한용호 변호사는 탄광근로자들로부터 산재보상 업무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 특히 박 고문은 1986년부터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진폐법 제정과 개정활동에 적극 참여해왔던 국내의 대표적인 전문가다.
현장을 중시했던 박 고문은 입법부가 2002년부터 진폐법에 대한 사회적 연구와 진폐장애급수 판정기준 산정, 광산근로자들의 실태 파악에 나섰을 때 의료계 전문의인 故윤임중박사(서울 가톨릭성모병원)와 함께 전국 광산에 속해있는 진폐병원들을 순회했던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광부들이 자주 가는 태백시입구 선술집에서 윤임중박사와 함께 광부들을 면담할 당시 광부들이 막장에서 작업화로 신었던 ‘땀범벅 탄가루범벅 장화’에 막걸리를 부어 넣은 후 광부들과 함께 따라 마신 ‘검은 막걸리’는 지금도 태백시의 전설이 되고 있는 것.
광부들 스스로도 “마치 송장 썩는 듯한 냄새가 난다”며 극구 피하던 막장 장화 막걸리를 마시고 난 후부터 그는 “광부들과 말문이 트였고, 광부들을 위해 평생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승철 뷰티한국 편집위원 cow242@beauty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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