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모스크바로 달리는 열차 안. 한 무리의 러시아 사관생도들이 좁고 지저분한 3등칸을 피해 1등칸으로 몰려온다. 이곳에서 사관생도 안드레이 톨스토이(올렉 멘시코프)는 벌목기계를 러시아 정부에 팔기 위해 고용된 미국인 여성로비스트 제인 칼라한(줄리아 오몬드)을 만나 국경을 초월한 사랑에 빠진다.
칼라한의 로비대상은 공교롭게도 황제의 오른팔이자 사관학교 교장인 레들로프(알렉세이 페트렌코) 장군이다. 칼라한에게 마음을 빼앗긴 레들로프와 톨스토이, 묘한 삼각관계는 두 남자의 질투심에 불을 붙였다. 결국 공연장에서 레들로프를 바이올린 활로 내리친 톨스토이는 시베리아로 쫒겨가고, 톨스토이를 잊지 못한 칼라한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를 찾아 나선다. 톨스토이의 흔적만 발견하고 뒤돌아서는 칼라한, 칼라한이 탄 마차를 먼발치에서 쳐다보는 톨스토이.
스토리만으로 가슴 애틋한 이 영화는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의 'The Barber of Siberia'다. 시베리아의 이발사라는 영화제목은 벌목기계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개봉됐다. 영화는 칼라한이 미국 사관학교에 입대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야기로 풀어간다. 영화 마지막에야 공개된 아들의 얼굴은 바로 톨스토이 판박이다.
막상 러시아로 가기로 했지만 정보는 모자랐다. 그러던 차에 만난 이 영화는 러시아, 특히 모스크바에 대한 많은 것을 알려줬다. 모스크바의 옛 모습, 보드카로 곤드레만드레 취한 레들로프가 얼음 물로 냉샤워를 한 후 사우나를 찾는 장면, 크레믈린 궁전 안에서 열린 사관생도 열병식 등은 모스크바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영상이었다.
러시아가 문화 예술의 국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특히 문학에 대해 얘기하자면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솔제니찐 고리키 도스토예프스키 등 그냥 떠오르는 인물만 해도 한 묶음이다.
이발소하면 떠오르는 러시아 문인이 한 명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로 시작되는 이 시는 러시아 국민시인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이다. 어릴 적 이발소 한 켠에 걸려있는 이 시를 보고는 패러디 작품을 꽤나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시험성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깡패한테 두들겨 맞더라도’ 등 앞자리만 바꿔 위로를 삼았다.
바로 그 시의 주인공, 푸시킨이 살았던 집이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에 있었다. 연한 하늘색의 2층 집 바로 앞에는 그와 아내의 동상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면 맞잡은 듯한 두 사람의 손은 떨어져 있다. 비극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요조숙녀는 아니었다. 러시아근위대의 프랑스인 장교 단테스와 곤차로바의 추문은 푸시킨을 내내 괴롭혔다. 결국 두 남자는 권총에 총알을 장전한 채 고전적인 방식의 결투를 벌이게 된다. 글만 쓰던 푸시킨이 군인과 총싸움을 벌인 것은, 두 사람이 백일장으로 우위를 가리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었지만 결투는 결투였다. 총상을 입은 푸시킨은 결투 이틀 후인 1837년 1월29일 숨을 거뒀다. 문상 인파가 5만에 가깝게 줄을 잇자 니콜라이 1세가 6만의 군대로 보초를 서게 하고 푸시킨의 관을 미하일로프스코예 인근 수도원으로 급히 옮기기도 했다.
이 거리를 한번 걷는 것으로 모스크바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거리에는 화가와 악사, 커피숍, 바, 레스토랑 등 10대부터 중장년까지는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예술과는 담을 쌓다시피 살고 있지만 모스크바 거리를 걷다보면 집 나간 교양이 마구 돌아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3층 이상의 극장이 100개가 넘는 이 도시에서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금 80유로를 투자해서 발레를 감상키로 결심했다.
발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였다. 극장이 ‘볼쇼이’였으면 좋았겠지만 바로 왼쪽에 있는 ‘젊은 극장’으로 정해졌다. ‘백조의 호수’는 예전에 본 적이 있기도 해서 포기했다. 극장 안은 슈박스 형태로 2층까지 관객이 만원이었다. 1층 앞에서 여섯 번째 줄에 앉아 있으려니 무대 위 배우들의 표정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무대는 화려했고, 배우들은 역동적이었다. 미녀가 한 자리에서 계속 돌 때는 박수가 우레처럼 터져나왔다. 모스크바에서 맛보는 발레 맛이 달랐다. 발레를 제대로 알기야 하겠냐마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도 시간 개념은 좀 희박했다. 공연 시작 후에도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시골 영화관에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예술을 생활화하고 있어서 그렇겠거니, 좋게 생각했다.
발레감상 후 모스크바 지하철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역사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장난이 아니었다. 끝이 내려다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2분이 지나서야 승강장에 도착했다. 지하 50m에서 100m 깊이의 지하철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방공호로도 활용됐다. 전쟁 기간 중 이곳에서 200여명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 땅속 깊은 공간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지하철을 보노라면 인간이 무섭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위안거리는 이곳 지하철이 하나의 미술관이라는 사실이다. 지하의 쾨쾨한 공간에 예술을 숨쉬게 한 이들은 위대했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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