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은 건강에 해롭다’라 쓰고
‘흡연은 나쁜 짓이다’로 읽어
건강이란 의무 달성하지 못해
죄책감ㆍ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건강 신드롬
칼 세데르스트룀, 앙드레 스파이서 지음ㆍ조응주 옮김
민들레 발행ㆍ256쪽ㆍ1만2,000원
웰빙이란 말이 국내에 수입된 건 2000년 이후다. 성장을 향해 미친 듯이 폭주하는 사회에서 ‘느리게, 건강하게, 행복하게’를 외치는 웰빙은 시대적 요구이자 사축(社畜)들에 선포된 복음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웰빙은 명령이 되었다. 건강을 챙기지 않는 사람은 사회의 반동분자다. 술과 담배, 기름진 음식으로 제 몸을 오염시키는 이들을 향한 이 사회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엄혹하다. 웰빙은 어쩌다가 도덕적 의무가 됐을까.
‘건강 신드롬’은 스웨덴 학자와 영국 학자가 함께 쓴 웰니스 강박에 대한 책이다. 웰니스(wellness)는 웰빙(well-being)과 행복(happiness), 건강(fitness)의 합성어로 신체와 정신은 물론 사회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의미한다. 국내에는 웰니스가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여기선 웰빙이나 건강이란 말로 대체한다. 출판사가 ‘웰니스 신드롬’이란 원제를 ‘건강 신드롬’으로 바꾼 것도 같은 이유다.
저자들은 오늘날 건강이 선택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됐다고 말한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병원에서 약을 처방 받으라는 조언 뒤에는 우울증이 치료 가능한 것이라는 깨달음뿐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최적의 상태로 가꾸는 건 개인의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이 비교적 최신의 것임은 역사 속 쇠약한 천재들의 삶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에라스무스, 사르트르 등 불후의 사상가들이 보여준 드높은 학식과 날카로운 통찰은 늘 병든 몸과 그것을 악화시키는 방종한 삶과 한 세트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시인 이상이 이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날개’와 ‘오감도’를 썼고, 그리고 각혈을 했기 때문이다. 매 끼니마다 지방 함량과 칼로리를 계산하고 흡연자들을 토끼몰이하듯 몰아내고 운동으로 바뀌는 체형의 변화를 SNS에 올리는 삶이 역사적으로 늘 선호돼왔던 것은 아니다. 그럼 왜, 언제부터일까.
흡연의 몰락은 건강을 해치는 것이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공공장소 금연을 최초로 실시한 나라는 나치 독일이다. 인종적 순수성을 강조한 나치 독일은 알코올중독자와 흡연자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부류로 취급해 탄압했다. 이후 70여 년간 의학계가 흡연의 무수한 폐해를 밝혀내면서 금연운동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흡연이 신자유주의 정신, 즉 개인의 권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단히 정치적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탈정치화해 도덕의 자리로 승격됐다는 사실이다. “흡연은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 진술이 흡연은 나쁘다는 말로 축약”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오류투성이지만 누구도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가 도덕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남은 것은 옳고 그름뿐이다. 금연, 다이어트, 균형 잡힌 식생활에 대한 요구는 정당해진다. 행복과 건강은 선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다.
건강해서 나쁠 건 뭔가,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저자들은 웰빙이 독트린이 되면 그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된다고 말한다. 모든 이에게 선한 삶에 대한 의무가 주어지는 것처럼 모든 이에게 건강하고 행복할 책임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 아래에는 개인에게 그것을 달성할 역량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가능한가. 저자들은 웰빙 신드롬의 부작용으로 “불안, 자기비난, 죄책감”을 꼽는다. 스스로에게 건강과 행복을 선물하는 데 실패한 개인은 우습게도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린다. 웰빙을 위해 시작한 다이어트가 개인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광경을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했다. 저자들은 이제 그만 행복 좇기를 멈추라고 말한다.
“탈출로를 찾는 첫걸음은 강박적으로 몸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을 멈추고, 건강과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는 환상을 깨는 데 있는 게 아닐까?”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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