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방 함량이 높을수록
공기 양이 적을수록 고급
수분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설탕이 과하면 질척질척
유지방 과하면 버터 같아
수분:설탕:유지방 비율은
60:15:10~20이 적절
그것은 처음엔 차갑게 입 안을 채우며 온 몸에 한기를 전달한다. 더위에 절어 무기력해진 온 몸을 시원하게 깨운다. 그것이 혀 위에서 점차 체온에 가까워지며 부드럽게 녹으면 온도에 숨겨졌던 달콤하고 풍부한 맛이 흠뻑 터져 나온다.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가진 액체는 식도를 타고 몸 속까지 식히며 깊숙이 내려가 버리고, 혀 위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의 기쁨을 아는 뇌는 환희의 신경물질을 마구 분출한다. 더위는 잠시 잊힌다. 정신이 반짝 든다. ‘폭염성 무기력증’이라고 이름 붙여도 마땅할 이 끝나지 않는 끈적한 무더위 속의 만사가 다 덧없는 나날, 아이스크림 한 입은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물론 깊숙한 더위까지 식히고 수분을 보충하는 데엔 차가운 물 한 잔이 가장 좋음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아이스크림은 특유의 마력으로 늘어진 정신을 달래고 활기를 보충하는, 생존과 다른 쾌락 차원의 문제다.
17세기 조선에 상륙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 하멜은 조선인들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을 ‘하멜 표류기’에 기록해두었다. 한편 과학자 해롤드 맥기의 저서 ‘음식과 요리’에 따르면 1900년 미국을 방문한 한 영국인은 미국인들이 엄청난 양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을 비사로 기록해두었다. 조선인들의 식사량은 날로 줄어들었지만, 미국인들의 아이스크림 폭식은 여전한 모양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1인당 20L씩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상점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는 사이즈도 파인트(473㎖) 사이즈가 아니라 호탕한 쿼트(946㎖) 사이즈다.
아이스크림을 얘기함에 있어 미국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는 이유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그 무지막지한 편애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스크림을 고급스러운 디저트로 꽃 피운 것은 유럽의 일이었지만 그것을 대중화하고 산업화한 것은 미국의 일이었다. 19세기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어에서 아이스크림 기술의 대격변이 일어났고, 두 도시의 공헌으로 현재 대량생산 되는 아이스크림은 고른 질감을 가진 산업화된 아이스크림 특유의 매끈함을 갖고 있으며, 대량생산에 걸맞은 보관성을 갖기 위해 신제조공법 개발에 열을 올렸다. 자연재료부터 합성재료까지 기발한 재료들도 첨가된다.
크게 나눠 프리미엄부터 레귤러,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이 속하는 이코노미까지 다양한 등급의 아이스크림이 있으며 그 등급 사이에는 재료와 제조법의 차이가 있지만, 크림 자체의 농후함이 강조되는 필라델피아식 아이스크림이 미국계 아이스크림의 표준적인 맛이다. 슈퍼 프리미엄 등급은 15~18%, 프리미엄 등급은 유지방이 11~15% 함유돼 있다. 등급이 내려갈수록 유지방 함량이 낮아지며 이코노미 등급에서는 10% 함량을 지키도록 한다.
더불어 아이스크림 등급에는 ‘오버런(overrun)’도 관여한다. 오버런은 완성된 아이스크림 부피가 원래의 혼합물보다 얼마나 커졌는가, 즉 부피 증가분을 가리킨다. 100% 오버런의 아이스크림은 곧 공기 반, 아이스크림 반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버런이 적을수록 등급이 높은데, 슈퍼 프리미엄의 오버런은 20퍼센트까지도 내려가 거의 공기가 없어 젤라토와 질감이 비슷해진다. 프리미엄은 60~90%, 레귤러는 90~100%, 이코노미는 95~100%다. 공기가 많을수록 푹신할 것 같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다. 막걸리로 발효시킨 떡, 증편을 생각해 보면 된다. 공기(발효가 일어나며 생긴 구멍)가 많을수록 푹신한 질감에 기여하겠지만, 어느 선을 넘고 나면 형태 유지가 되지 않고 흐트러지거나 부서진다. ‘게스트로노믹(Gastrominic) 아이스크림’을 표방하는 펠앤콜 최호준 대표에 따르면 아이스크림에 공기가 반이라면 싸래기눈처럼 흩어져버린다. 오버런 100%의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에서 흩어지는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크림 모양새를 하고 만들기 위해서는 공기를 함유한 상태 그대로 순간적으로 얼릴 필요도 있지만 유통 중 미세하게 해동될 때나 녹으면서 무너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안정제를 더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천연 안정제로는 젤라틴, 한천, 카라기난, 타피오카전분, 옥수수전분, 글루코오스 시럽, 아라비아검, 구아검, 로커스트콩검, 셀룰로오스검, 타마린드검, 산탄검 등이 사용된다. 이런 재료는 저지방, 무지방 아이스크림일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아이스크림 제조법에서 이런 재료가 첨가될 이유는 전혀 없다. 실제로 주방을 가진 소규모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는 마치 몇 세기 전의 아이스크림처럼 원론적인 재료를 사용해 아이스크림을 만들며, 가격이 비쌀수록 어려운 이름을 가진 첨가물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 그러니 소규모 아이스크림 집들이 비싸다 한탄하기 전에 그 합당한 번거로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스크림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우유(혹은 크림)와 설탕, 공기다. 우유나 크림의 지방은 아이스크림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분 사이사이에 파고들어 얼음 결정이 커지는 것을 방해한다. 당연히 아이스크림 안에는 물과 지방이 공존하고 있다. 섞이지 않는 두 성질을 하나로 섞이게 하는 것이 유화제다. 달걀 노른자가 대표적인 아이스크림의 유화제이자 안정제다. 노른자 속의 단백질인 레시틴이 이 작용을 한다.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에서는 대두 레시틴, 모노&디글리세라이드, 폴리소르베이트 등을 첨가해 사용하기도 한다.
설탕은 단맛을 내는 역할도 하지만 수분의 일부를 슬러시처럼 바꿔놓아 아이스크림을 속에서부터 냉각시킨다. 물론 주된 냉각원은 아이스크림 혼합물을 둘러싼 통 밖의 냉매다. 고전적으로는 소금을 뿌려 녹는점이 낮아진 얼음이 그 역할을 했다. 혼합물 안에서 슬러시가 되지 않은 수분은 설탕이 녹아 빙점이 낮은 시럽 형태로 아이스크림 속에 섞인다. 공기는 아이스크림을 냉각기 안에서 휘저을 때 들어가는데, 빨리 휘저어 아이스크림 안의 공기가 많을수록 가볍게 녹는다. 보관할 때의 온도도 중요한데, 온도가 낮을수록 아이스크림은 딱딱해지고 높으면 부드럽다.
아이스크림은 수분이 너무 많아서도 안되며, 설탕이 과하면 질척거리고 유지방이 과하면 버터가 돼버린다. 이상적인 아이스크림은 60%의 수분, 15%의 설탕, 10~20%의 유지방을 가지며 질감이 고르고 크림 같이 부드러우며 탄탄해서 씹히는 것 같은 농도를 가진다. 보관할 때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냉동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냉동실 온도는 오르락내리락한다. 바깥 온도가 높은 날은 문을 여는 것만으로 아이스크림은 표면이 녹을 수 있다. 다시 어는 과정에서 아이스크림은 참담한 상태가 된다. 녹았다 언 아이스크림은 덜 해동된 메생이 덩어리를 씹는 것 같은 불쾌한 질감이 된다. 얼음 결정에 녹은 물이 달라붙어 결정이 자라난 탓이다. 모든 음식에는 수분이 포함돼있으므로 이 변화는 어떤 냉동식품에서도 해당된다. 편의점 냉동고를 닫은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 아이스크림 제조과정의 모든 것은 얼음 결정을 작게 하려는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과 매력적인 향은 차라리 둘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과하지 않다. 얼음 결정의 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그 각각의 크기가 작을수록 아이스크림은 부드러운 질감으로, 달콤한 쾌락으로 각별히 시원하게 이 여름을 녹인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아이스크림의 친구들, 같은 듯 다른 빙과
소프트 아이스크림 - 일반 아이스크림보다 유지방 함량이 낮고, 높은 온도에서 만든다. 오버런이 높아 입술에 닿는 순간 부드럽게 허물어진다.
젤라또(gelato) - ‘얼었다’는 뜻의 이탈리아어이지만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크림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며, 우유로 만든다. 오버런이 20%가량으로 낮고 당도가 덜한 것이 특징. 보관 온도도 아이스크림에 비해 높다.
크렘 글라세(creme glacee) - 프렌치 스타일 아이스크림, 프로즌 커스터드라고도 부른다. 달걀 노른자로 만든 커스터드가 들어가 특유의 달걀 맛이 난다.
소르베(Sorbet) - 우유를 넣지 않고 과일 퓨레를 잘 휘저어 그대로 얼린다. 유제품을 사용하지 않아 비건용으로 통한다.
셔벗(Sherbet) - 소르베와 같지만 우유가 들어가는 것이 차이.
그라니타(Granita) - 마찬가지로 소르베와 비슷하지만 휘젓지 않은 퓨레를 얼리는 동안 긁어내어 얼음 자체의 질감을 살린다. 가정에서 만들어 보기 가장 쉬운 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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