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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누군가 응답해야 한다

입력
2016.08.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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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이 도시의 풍경을 바꾸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1990년대 초반 직장이 있던 홍익대 근처에서 처음 접한 편의점은 투명한 유리 너머 환한 사각의 세계로 기억에 남아 있다. 냉장 칸의 도시락이 신기해서 굳이 야식으로 사먹은 적도 많았지 싶다. 김애란의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2003)는 바로 그 편의점에서 ‘평균적인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을 소비하게 된 생활의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하면서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편의점의 “거대한 관대” 뒤에 숨은 현대 도시 속 단절, 비애와 누추함을 이야기한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 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에 약간의 변주만으로 반복되는 이 문장들은 앞으로도 오래 서울이라는 도시를 환기하는 표지로 남을 듯하다.

5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서울 외곽, 황량한 신도시 편의점의 밤을 지키고 있다. 그녀의 신분은 ‘알바’다. 일주일에 세 번씩 자정부터 아침 6시까지 편의점 카운터를 지켜온 지 1년째지만 젊은 손님이 편의점으로 들어서면 거의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된다. 혹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운 것이다. 얼마 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조해진의 단편 ‘산책자의 행복’(‘창비’ 2016년 봄호) 이야기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 대학에서 강사 신분으로 철학을 가르쳤다. 철학과가 통폐합되고 교양수업이 폐강되면서 대학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고, 어머니의 병원비와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급전직하.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고 정부가 지정해준 임대아파트가 있는 신도시로 이주해서 편의점 알바로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책과 논문을 버린 날도 있고 캄캄한 방에 누워 “가능하고도 합리적인 죽음의 방법”을 고민한 날도 있다. 그녀가 강의실에서 뱉어낸 관념과 추상의 언어들은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하고, ‘불행’이나 ‘죽음’ 같은 철학적 사유의 계기들은 철저히 현실의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그녀는 아내와 사별한 편의점 사장의 품 안을 잠시 꿈꾸어보기도 하거니와, 그 새벽의 짧은 욕망과 상상은 정녕 쓰라리다. 그러거나, 사장과 교대해 편의점을 나서면 “쓰라림도 회한도 없는 초라한 사랑이 지나가고 대신 기초생활수급자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조해진 소설의 인물이 겪는 추락의 현실이 전혀 과장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딛는 곳이 나락이 될 수도 있다는” 실감을 누구나 얼마만큼은 갖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런 불안의 현실은 그녀의 마지막 제자인 중국인 학생 메이린이 유학지인 독일의 소도시에서 보내오는 이메일 편지에도 담겨 있다. 그곳에는 난민의 유입을 반대하는 거리 행진 뒤로 극우 세력의 난동이 이어지기도 하고, 시민권을 가진 쿠르드계 이민자 젊은이가 어느 날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해 있기도 한다. 강단에서 내몰린 한국의 라오슈(老師, 스승)에게 계속 응답 없는 편지를 보내는 메이린 역시 모를 리 있겠는가. 세계에 편재한 불안의 지반이 실존의 차원에서도,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도 쉬이 개선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에, 그녀가 스스로의 불안 앞에서 거듭 환기하는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라’는 라오슈의 가르침은 무력함의 역설로 그녀를, 우리를 얼마간 위로한다. 그러나 그녀의 라오슈가 불안에 지친 새벽길 한가운데에서 내뱉는 절규, “살고 싶어. 미치도록…… 살고 싶어”에는 도대체 누가 응답한단 말인가. 김애란의 ‘편의점’ 이야기에도 한 소녀의 처참한 사고사가 나오거니와, 지금 조해진의 ‘편의점’에서는 ‘살아 있음’이 죽음이 되고 있는 것인가. “사는 게 원래 이토록 무서운 거니, 메이린?” 답이 잘 보이지 않는 대로, 이 편지에는 누군가 응답해야 한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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