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18일
진화생물학과 생리학의 발전으로 잉태된 생물학의 흑역사인 우생학은 1920~30년대만 해도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의 하나로 주목 받았다. 캐나다와 덴마크 스위스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유전적 질환을 가진 이들의 불임 시술을 한동안 법으로 강제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드러낸 인종과 장애인 동성애자 집시 등에 대한 병적인 편견은,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지금만큼 괴이쩍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력을 쥔 나치가 1933년 ‘유전 질환 자녀 출산 금지법(일명 단종법)’을 통과시킨 것도 나치만의 악덕이라 할 수도 없다. 불임 대상에는 분열증과 간질 등 정신 질환자와 만성 알콜중독자가 포함됐고, 점차 육체 장애인으로 확대 시행됐다. 30년대 후반 들면서 시술 대상자가 줄어든 것은 노동력 부족 우려 때문이었다.
1939년 10월 나치는 훗날 ‘T-4 프로그램’이라 알려진 적극적인 장애인 학살(그들은 안락사라 불렀다)을 시작했다. 장기적으로는 아리안 민족의 ‘건강성’을 제고하고, 단기적으로는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였다.(T-4는 저 계획의 실행을 주도했던 본부 건물의 주소, 즉 베를린 티어가르텐 가 4번지에서 유래했다.) 그 직전 한 시민이 시력 장애 등을 안고 태어난 자기 아이를 ‘자비롭게 죽여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나치 정부에 냈고, 히틀러는 그 청을 수용한다. T-4 프로그램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불과 석 달 전이었다. 전시의 나치는 불치병과 정신질환자 장애인 등의 보호ㆍ치료시설 유지 비용이 얼마나 낭비이며, ‘안락사’가 자비로운 일인지 선전하는 사례로 저 아비의 예를 활용했다. 장애인 학살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아동에서 성인으로 확산됐고, 학살 생체실험이 병행됐다. 나치는 그 기술을 홀로코스트에 적용했다.
T-4 프로그램은 1941년 8월 18일 공식적으로는 종료됐다. 나치의 주요 지지기반이던 독일의 교회가 반발했고, 히틀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회의 원성이 부담스러웠다. 그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는 7만 5,000명이지만 최대 20여 만 명의 장애인이 학살됐다. 하지만 ‘종료’가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거대한 야만에 흡수됐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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