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한국일보에 실린 박선영 기자의 “호구 되기 싫은 당신을 위한 ‘거절의 기술’”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어라, 내 이야기인가?
차마 거절하지 못해 ‘도를 아십니까?’ 청년에게 이끌려 본부 사무실에 가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본인은 손가락만 빨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낸다는 직장 상사 대신 가족과 헤어져 주말 출근을 하고, 원치도 않는 사람들 틈에 껴서 황금 같은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 기사는 이러한 ‘예스병’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다고 말하며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수전 뉴먼의 말을 인용한다.
“항상 남의 비위를 맞추는 피플 플리저(people pleaser)들은 외부의 승인으로부터 안정감과 자신감을 추구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게으르거나 인정머리 없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미움받거나 왕따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싫다’고 거절하지 못한다.”
여기에 한국의 ‘유교문화와 집단주의 문화’가 더해지면 상황은 좀 더 복잡해진다. 기사는 계속해서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 할까’를 출간한 저자 김호의 말을 전한다. “부모에게 ‘노’라고 못하고 자란 아이는, 결국 학교나 직장에 가서도 선생님이나 상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기 힘들어지고, 심지어 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때마저도 ‘노’라고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주로 일이다. 친한 사람은 친한 사람이라서, 덜 친한 사람은 덜 친한 사람이라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라서 거절하기 힘들다. 개인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요인들이 뒤섞여 ‘예스’를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친한 사람과 덜 친한 사람의 경우,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상대가 혹시나 마음 상할까 마음이 쓰인다. 많은 경우, 용기를 내서 거절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게 문제다. 거절의 이유를 집요하게 물어보거나 서운함을 내비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조르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예스라고 말하게 된다.
반면 모르는 사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알다시피 프리랜서는 전혀 ‘프리’하지 않은 직종이고, 대부분의 프리랜서는 본인이 일을 조절한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사람들이다. 일이 많을 때는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많지만, 일이 없을 때는 이러다 굶어 죽겠다 싶을 정도로 일이 없다. 따라서 모르는 사람의 일을 거절해야 할 때 나는 두려워진다. 이 사람이 기분 상해서, 두 번 거절당하기 싫어서, 진짜 늘 바쁠 거라고 생각해서 앞으로 다시는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것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회사원은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자영업자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고, 프리랜서는 클라이언트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때때로 거절은 치명적이다. 자칫 상대의 기분(요즘 SNS에서는 이것을 ‘KIBUN’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던데)을 거스르면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만연한 시대를 우리는 산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어쩌면 내가 너무 ‘쫄아’있는 건 아닌가. 최근 나는 일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잠시 짬을 내어 아내와 함께 마트에 갔다. 가전제품을 전시한 매장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앞을 기웃거리던 내게 아내가 물었다. “살래?” 그것이야말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지만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국 거절하고 말았다. 일 때문이다.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판에 게임기를 사는 것은 내게 자살행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내에게 됐다고 말하며 나는 거의 울 뻔했다.
눈물이 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을 거절하지 못해 아내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하지 못해 플레이스테이션을 거절하다니. 말도 안 돼. 그래서 이제 나는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를 묻는다면 플레이스테이션 때문이라고 대답할 생각이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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