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암 진단받은 英 전공의
바쁜 일정 속 남편과 美 여행
통증에 리조트 대신 병원으로
수술도 불가능한 희귀암 통보
무심한 의료진 태도에 거듭 절망
준공무원 신분 NHS 병원 의사
입원 환자에 ‘○번 베드’ 호칭
정서적 배려커녕 기계식 대응만
‘안녕 내 이름은…’ 캠페인 창안
“자기소개부터 서로에 신뢰를”
유럽ㆍ북미로 확산되며 신드롬
인간적 고결함 중요성 일깨워
32세 난치 암 환자 케이트 그레인저(Kate Granger)는 2013년 어느 날 병원에서 아주 살맛 나는 경험을 한다. 이동침대를 밀어주러 온 직원이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브라이언입니다”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 거였다. 그 인사 한 마디에 그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항암치료를 받아온 지난 2년 동안, 어쩌면 의대를 나와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 못한 작은 기적이었다.(theglobeandmail.com, 2016.6.26)
그 경험이 그를 달라지게 했다. 암 확진 진단을 듣던 2011년의 기억도 떠올랐다. 불쑥 병실에 들어선 의사는 아무런 정서적 배려 없이,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곁에 누가 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도 없이, MRI 판독 결과를 알려주었다. 암세포가 여러 곳으로 전이됐다는 말. 신장 스텐트(stent)를 교체 시술을 위해 입원한 병동에서 그는 ‘7번 베드’로 불렸다.
‘7번 베드’의 그는 2013년 8월 21일 자신의 트위터(@GrangerKate)에 이런 글을 올렸다. “제가 ‘Hello, My name is…’ 캠페인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hellomynameis” 의사와 간호사, 접수처 직원과 포터가 환자에게 자기 소개를 해달라는 거였다. “그건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저는 믿어요. 자기 소개는, 상처 받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과 그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인간적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의료적 관계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의 캠페인은 큰 호응을 얻으며 10억 개가 넘는 해시태그 트윗을 이끌어냈고, 영국을 넘어 유럽과 북미의 병원들로 확산됐다. 지친 환자와 의사에게 인간적 존엄의 가치를 일깨우고 타성에 젖은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NHS)에 생기를 돌게 한, 환자이자 의사 케이트 그레인저가 7월 23일 별세했다. 향년 34세.
그레인저는 1981년 10월 31일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주 허더즈필드에서 태어났다. 8살 무렵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2005년 에든버러대에서 약리학과 의학사 학위를 받고 곧장 국가의료기관인 미드요크셔병원(Pindersfields)에서 인턴-수련의 과정을 시작했다. 졸업반이던 2004년 크리스와 결혼한 뒤로도 내내 바빴으니 2011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샌터크루즈로 떠난 여행은 부부에겐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다. 주말을 위해 예약해둔 몬터레이 해변 리조트까지 컨버터블을 빌려 타고 드라이브를 하던 때였다고 한다. 몇 주째 거슬리던 그레인저의 등 통증이 견디기 힘들만큼 심해졌고, 둘은 리조트가 아니라 샌터크루즈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혈액검사, 초음파, CT…. 병원에선 하복부 종양이 커져 요관을 누르면서 신부전으로 이어진 상태로 난소암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 조직검사와 수술을 위해 스탠퍼드 의대로 옮기라고 제안했다. 그는 뇨관(尿管)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응급시술만 받고 영국으로 돌아왔다.(yorkshirepost.co.uk, 2012.6.14) 영국의 NHS는 미국과 달리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의료서비스로, 당연히 진료비가 무료다. 그리고 자신이 NHS의 노인병 전공의(레지던트)였다.
2주간 긴 검사를 받은 결과 그의 병은 복막조직결합성소원형세포종양(DSRCT)이라는, 아주 사납고 희귀한 암이었다. 암세포는 이미 림프절과 간, 뼈로 전이돼 수술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형 소매용품 체인 ‘아스다 Asda’의 매니저인 남편은 직장에 있었고, 그는 저 진단을 처음 보는 의사에게서 혼자 들어야 했다. 그날 그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한없이 울었다고, 그런 뒤에 자기가 직접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의사가 적절히 설명하리라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sarcomahelp.org, ‘Kate’s Story)
병원 측은 그에게 3주 단위로 모두 8차례의 화학치료 처방을 내렸다. 항암 주사를 맞은 날부터 일주일 동안은 아무 것도 먹고 마실 수조차 없을 만큼 심한 구토와 오한, 무기력증을 견뎌야 했다. 혈소판 파괴로 인한 하혈, 호중성백혈구 감소, 치렁치렁 매달린 약병과 튜브들…. 한 사이클이 끝나는 3주 동안 퇴원해 집에 머무는 건 고작 사나흘에 불과했다. 그는 그렇게 5번을 받고 그 해 말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심했고, 남편도 동의했다. 헛된 기대로 병실에 갇혀 항암치료로 고생하다가 귀한 시간 다 잃어버리는 사례를 누구보다 많이 지켜봤고, 뭐든 스스로 파악해서 자기 통제하에 두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control freak) 사람이 아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화학치료를 중단한 지 3주 째인 이듬해1월, 그는 병원에 복귀해 전과 똑같이 전공의 과정을 이어갔다. 그 해 9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죽어가는 젊고 가련한 의사가 아니라, 진단 전과 똑같이 환자를 보살피는 유능하고 성실한 레지던트로 여겨지기를 원한다”고 썼다. 하지만 마음까지 전과 똑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 달 뒤의 생일이 생애 마지막 생일일지 모르고, 곧 태어날 조카 얼굴조차 못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는 2개월 앞만 보고 살자는 게 삶의 전략이라고 썼다.
일기를 써보라는 주치의의 제안을 받고 블로그를 시작한 게 그 무렵부터였다.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암 환자가 된 뒤로 깨닫기 시작했다. 환자에게 말할 때 손을 잡아주는 일, 내려다보지 않고 나란히 앉는 일, 공감의 화법, 보호자를 대하는 방법….” 의사가 되려던 유년의 꿈, 의사로서 겪은 일, 환자가 된 뒤 느낀 일 등을 적은 그의 블로그 글은 ‘The other Side’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됐다. 항암 치료의 육체적ㆍ정신적 고통과 화학치료 중단, 다시 의사로 복귀하기까지의 심경 등 암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글들은 ‘The Bright Side’라는 책이 됐다. 그렇게 그는 작가가 됐고, 신문과 잡지에 활발히 글을 썼고, 라디오와 TV쇼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는 유명해졌다.
‘컨트롤 프리크’답게, 일찌감치 자신의 장례식 음악과 음식, 드레스코드까지 짜둔 그였다. 혼자 또 남편과 함께 경험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지워가는 것만으로도, 환자가 되기 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결혼 서약 새로 쓰기, 런던 사보이호텔에서 에프터눈 티 마시기, 파리와 뉴욕과 바르셀로나 여행하기, 스카이다이빙 해보기, 문신 하기…. 그 중에는 먼 미래의 일이라 혼자만 알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크리스는 그레인저가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지냈다고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음 주말 저녁의 근사한 식사 같은 게 단기 목표라면, 생일 파티 같은 건 중기 목표이고, 미국 여행은 장기 목표죠. 하지만 장기 목표는 임박해지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누군가에게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죠.”(telegraph.co.uk, 16.5.21)
그레인저는 죽음과 죽어가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기를,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트위터도 시작했다. 2013년 3월 23일 그는 말기암 환자의 일상을 들려줄 테니 적절한 해시태그를 추천해달라고, 무조건 재미있는 거여야 한다고 트위터에 썼다. 그는 “유머가 마음을 열어주고 용기를 북돋워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표정에 늘 미소를 띠고 있고, 죽을 때도 멋진 유머와 함께 죽고 싶다.(…) 유머의 전염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게 다가오는 거대한 삶의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팔로워들은 ‘#deathbedlive(죽음의 침상 생중계)’ ‘#finalcountdown(마지막 카운트다운)’ ‘onedieseveryminute(매순간 죽어가는 자)’ 같은 것들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는 ‘#deathbedlive’를 선택했다.
5번의 항암치료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상태가 진정됐고, 통증도 견딜 만해졌다. 이후 더 활달해진 그의 일상에, 기대를 품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인 그는 ‘1%의 기적’같은 통계 너머의 희망을 경계했다. 요컨대 그의 블랙유머는 죽음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가장 덜 고통스러운 방법이었다.
난치(불치) 암 치료에는 크게 완화(palliative)치료와 치유(curative)치료가 있다. 화학요법이 발전해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긴 했지만 그는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화학요법은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부작용 외에도 심장과 신장 기능 장애 같은 치명적 위험도 수반한다는 사실도 알렸다. “나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 남은 날의 양을 늘리는 대신 살아있을 날의 질을 추구해야 할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 순간을 내가 알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guardian, 14.4.14) 2014년 그의 상태가 악화했고 그는 다시 입원해 4차례 화학치료를 받았다. 이듬해 2월과 9월에도 각 2차례를 더 받았다.
그는 그렇게, 남은 시간의 양과 질을 저울질하며 멋진 추억을 만들고,‘죽음의 병상’에서 지내는 삶의 의미와 방법을 이야기하고, 전공의를 끝내고 진짜 의사(컨설턴트,전문의)가 되는 꿈을 이루어 갔다.
그의 ‘헬로 마이 네임 이즈…’ 캠페인은 그가 일하던 병원(Mid-Yorkshire Hospital) 의사와 간호사들을 시작으로 동참하는 병원들이 늘어갔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NHS 위원회에 캠페인 예산으로 4만 파운드를 지원하기도 했다. 틈만 보이면 국가의료서비스를 민영화하려고 벼르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와 제러미 헌트 등 보수당 정치인들도 캠페인에 동조했고, 프랑스 독일 이태리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많은 국가의 병원들도 대열에 동참했다. 그레인저는 여러 곳을 돌며 강연했고, NHS 관계자들을 만났고, 버킹엄 궁에 가서 찰스 왕세자에게서 훈장(MBE)도 받았고, 다우닝가의 초대도 받았고, 스코틀랜드 의회 연단에도 섰다. 2014년 2월 NHS는 ‘케이트 그레인즈 공감 치료상’을 제정했고, 그 해 7월 왕립의사협회는 아직 전공의였던 그를 회원으로 선출했다. 그가 컨설턴트가 된 건 올 초였고, 지난 5월에는 영국 의료계 최고의 영예라는 BMJ어워드 특별공로상을 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문구로 유명한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의 ‘베버리지 보고서(원명은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가 나온 건 1942년이었고, 국민의 건강만큼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48년 국가의료서비스가 시행됐다. 건강보험료를 내고 보건서비스를 받는 사회보험(NHI)과 달리, 영국과 북유럽 등의 NHS는 세금, 즉 정부 예산으로 보건 의료비용을 감당한다. 그래서 NHS 병원 의사는, 한국의 보건의처럼 준공무원 같은 신분이다. 영리 동인이 부족해 의료서비스 질이 떨어지고, 진료 대기 시간이 길다는 점은 영국 뿐 아니라 국가의료서비스를 시행하는 북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등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꼽힌다. 그 보완책으로 영국 역대 정부가 추진해온 일이 민영화와 민간 영리병원과의 결합 진료였다. 빠듯한 예산을 민간 영리병원과 나누다 보니 의료진 숫자는 더 줄어들고 처우도 나빠지는 악순환. 영국 NHS 병원 의사의 불친절과 무심함은 그런 사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거였다.
그레인저의 캠페인은 그러니까, 저 오랜 결핍의 타성에 젖어 있던 NHS를 각성시키고, NHS 의료진들이 잊고 있던 의사로서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 NHS와 그 종사자들이 선 자리의 의미와 역할을 환기시켰다. 그의 의사로서가 아니라 환자로서 진짜 의사가 되는 길을 열었다. 영국 환자자선연대 ‘National Voices’의 제러미 테일러 사무총장은 “그레인저는 단순한 캠페인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쇠잔해져 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고, 살이 빠질수록 미소도 도드라져갔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사진 찍어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그 무렵 그는 공포와의 싸움에 지지 않으려고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5월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는 절망과 포기의 유혹을 이야기했다. 함께 투병하다 먼저 간 이들을 언급하며 그는 “마지막까지 버티는 건 참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해낸 일들을 자랑스러워하며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불행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것과 두려움은 별개였다. 그렇게 흔들리고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 일, 그것이 그가 마지막까지 혼자 해낸 가장 중요한 캠페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금 목표액 25만 파운드를 채워 요크셔 암센터에 전한 뒤 리즈의 한 호스피스 병실에서 23일 별세했다.
26일 그의 트위터 계정에는, 누군가가 대신 썼을 이런 글이 올라왔다. “내 삶의 일부였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부디 내 놀라운 남편(@PointonChris)을 잘 보살펴주세요. 추신- 그가 레인지로버에 돈을 몽땅 써버리게 해선 안 돼요.” 그는 미소로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숨지기 나흘 전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신임 수상의 ‘헬로 마이 네임 이즈’ 캠페인 동참 편지를 받았다. “안녕 케이트. 내 이름은 테레사이고, 지난 주 데이비드 캐머런으로부터 수상 자리를 넘겨 받았어요.(…)” 그 편지에 그레인저가 바라던 내용, NHS를 민간자본에 넘기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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