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신체가 쇠약해져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
지난 8일 큰 파도가 치듯 일본이 일제히 술렁거린 사건이 발생했다. 신처럼 추앙받는 일왕이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일본 헌법상 일왕은 상징적 존재다. 일왕과 왕족은 선거권 및 피선거권도 없고 국가 일에 관련된 행위를 할 경우 정치적 중립을 위해 반드시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거치도록 돼 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에게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과거보다 희석되기는 했지만 아주 크다.
올해 83세인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이날 사전 녹화한 동영상을 통해 신체 쇠약을 이유로퇴위 의사를 밝혔다. 근 200년 동안 살아 있는 왕이 왕위를 넘긴 일이 없었기에 일본 국민들의 이목이 일제히 왕가로 집중됐다.
왜 일왕이 갑자기 사퇴 결심을 했을까. 일본 안팎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를 겨냥하기 위한 카드가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아베 총리의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했던 아키히토 일왕이 총리를 견제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라는 분석이다. 만약 일왕이 생전 퇴위를 하게 되면 아베 정권이 필요한 법 정비 등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 수행 조항을 명문화 하기 위한 개헌이 지연될 수 밖에 없다. 세간의 관측처럼 아키히토 일왕의 승부수가 통할 지, 일본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아버지인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2세이던 1945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패전해 항복하는 모습과 전후 복구를 위해 국민들이 고통스럽게 땀을 흘린 과정들을 지켜봤다. 이런 경험은 그가 평생 실정에 관여하지 않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생각을 지키는 배경이 됐다.
1956년 일본 왕족들이 주로 다니는 귀족 학교인 가큐슈인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아키히토 일왕은 이듬해 3월 한 테니스 대회에서 만난 평민 미치코(美智子)에게 첫눈에 반해 1959년 결혼했다. 미치코 왕비 사이에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를 비롯해 2남 1녀를 둔 그는 1989년 제125대 일왕으로 취임했다. 그의 연호는 헤이세이(平成)다.
아키히토 일왕은 비교적 한국에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그는 왕세자 때 “한국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1989년 즉위 후 회견에서 “(방한) 기회가 있다면 이해와 친선관계 증진에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2년 9월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쓰루오카 고지(鶴岡公二) 당시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에게 “언제인가 우리 부부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키히토 일왕은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아키히토 일왕이 한국에 친근감을 표시한 이유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백제계의 후손으로 믿고 있다. 2001년 68회 생일을 맞이한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간무(桓武)왕(재위 781~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또 왕실에 한국 요리사를 초청해 김치·잡채파티를 열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사망한 고 이수현씨를 소재로 다룬 영화도 관람했다. 그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朝香宮誠彦王)는 2004년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아키히토 일왕은 수 차례 일제의 조선 침략을 반성했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난 그는 “일본 때문에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한국인들이 겪었던 괴로움을 생각하면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통석의 염은 ‘애석하다’는 뜻의 우회적 표현으로 사과는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4년 3월에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서 “한반도 여러분께 크나큰 고난을 안겨준 시기가 있었다”며 “몇 해 전 이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명했고 지금도 변함없는 심정”이라고 언급했다. 2005년 6월에는 미국령 사이판의 한국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에 참배했다.
이 같은 아키히토 일왕의 모습은 급격히 우경화하는 아베 총리의 행보와 대조를 이뤘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해 8월 도쿄에서 열린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해서도 “앞선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런 그의 모습들은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그의 퇴위 의사는 의도된 승부수인지 알 수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극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아베 정권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28년 전 즉위했다. 이후 나는 일본 국민과 함께 나의 삶을 보냈고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을 함께 나누어 왔다. 나는 왕의 가장 우선적인 의무는 국민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때로는 국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마음과 가까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키히토 일왕은 나이와 건강 때문에 상징적 존재인 왕의 책무를 다하기 힘든 상황과 함께일본 국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퇴위 발표에 담았다. 그는 국민이라는 단어를 여러번 언급했고 국가의 상징이라는 문구를 여섯 번 사용했다. 이는 곧 국민들을 위한 관점에서 국가 정책을 다시 되돌아 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다.
지난 6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포함해 개헌파 보수정당들이 3분의2 의석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둔 아베 총리는 당장 다음달 국회에 개헌을 위한 헌법심사회를 가동하기로 했다. 야당인 민진당도 일단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그런데 일왕이 생전 퇴위를 밝히는 바람에 이를 위한 법적 절차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개헌 일정이 뒤로 미뤄질 수 있다.
그만큼 아베 정부로서는 일왕의 생전 튀위 의사가 반갑지 않은 상황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8일 일왕의 퇴위 선언 뒤 “일왕의 메시지를 무겁게 받아들여 어떤 조치가 가능한지 확실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 입법 일정은 밝히지 않았다.
강희경 기자 kst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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