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 꼬리표 떼고 2관왕
158㎝ 단신에도 강한 장력 지녀
42파운드 무거운 활 자유자재로
인천AG선 태풍 불 땐 승승장구
바람 잦아들자 은메달에 머물러
27살 때부터 기량 오른 ‘늦깎이’
“힘든 선발전 생각나 울컥했죠”
삼보드로무의 강한 바람은 ‘늦깎이’ 신궁의 탄생을 예감하는 표식이었다.
장혜진(29ㆍLH양궁단)은 12일(한국시간) 리우데자네이루 삼보드로무 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양궁 개인전 준결승에서 대표팀 동료 기보배(28ㆍ광주광역시청)을 누른 뒤 결승에서 리사 운루흐(28ㆍ독일)를 세트스코어 6-2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단체전에 이은 이번 대회 한국선수단의 첫 2관왕.
돌풍에 정면으로 맞서 얻은 결실이었다.
삼보드로무는 관중석 양쪽 측면이 높아 바람이 세게 분다. 특히 여자개인전 16강부터 결승이 열린 이날 ‘도깨비 바람’이 몰아쳤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오선택 LH양궁단 감독은 “바람이 셀 뿐 아니라 앞뒤로 불고 또 여기는 불고, 저기는 불지 않는 식으로 풍향을 종잡을 수 없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장혜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에 강한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보통 여자 선수들이 40파운드 내외의 활을 쓰는데 장혜진은 이보다 더 무거운 42파운드짜리 활을 사용한다. 여기서 파운드는 활의 무게가 아니라 활시위를 당기는 데 필요한 힘(장력)을 의미한다. 활의 강도가 셀수록 당기는 힘이 강하고 화살에 실리는 힘 역시 커서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다. 양궁인들은 파운드가 높을수록 ‘센 활’이라고 표현한다. 남자선수들은 보통 44파운드 활을 사용한다.
20년 이상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서거원 인천계양구청 감독은 “날씨가 좋을 때는 상관없지만 바람이 많이 불 때는 센 활을 쓰는 선수가 유리하다. 하지만 활만 세다고 능사가 아니다. 이 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혜진은 별명이 ‘짱콩(땅콩 중에 짱)’일 정도로 키(158cm)가 작은 편이지만 강한 장력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과거 국가대표 중에서는 냉정한 눈으로 과녁을 정확히 조준한다고 해서 ‘콜드 아이(Cold Eye)’라고 불린 박성현(32ㆍ2004 아테네올림픽 양궁 2관왕)이 센 활을 애용했다. 장혜진의 소속 팀 지도자인 오선택 감독은 “오늘 같은 날은 누가 10점을 많이 쏘느냐가 아니라 실수를 안 하느냐 싸움이다. (장)혜진이도 실수가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 있게 쐈다”고 평가했다. 이날 세계랭킹 1위 최미선(20ㆍ광주여대)은 알레한드라 발렌시아(22ㆍ멕시코)와 8강에서 첫발을 5점에 맞히며 1세트를 진 뒤 2,3세트를 모두 내줘 0-6으로 완패했다. 장혜진과 기보배도 4강 맞대결에서 각각 3점과 6점을 쏘는 실수를 했다. 서 감독은 “같은 실수를 해도 타이밍을 잃는 것과 잃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다. 장혜진은 슈팅 타이밍이 일정했지만 기보배는 타이밍이 늘 1~2초씩 늦었다. 많은 양궁인들이 장혜진의 우승을 예감했다”고 밝혔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 대회 직전 소멸됐던태풍 ‘풍웡’의 여진으로 계양아시아드양궁장에도 강한 바람이 불었다. 장혜진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올랐는데 당일에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장혜진은 정다소미(26ㆍ현대백화점)에게 패하며 은메달에 머물렀다. 결과적이지만 계속 강풍이 몰아쳤으면 장혜진이 금메달을 딸 수도 있었다.
장혜진은 대기만성형 스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양궁을 시작해 27세이던 2014년 양궁 월드컵에서 첫 개인전 금메달을 딸 정도로 뒤늦게 꽃을 피웠다. 2012년 런던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4위에 그쳐 3명이 나가는 올림픽에 못 간 아픔도 겪었다. 작년 9월 리우에서 열린 프레올림픽(테스트이벤트 대회) 때도 후보로 참가했다. 장혜진은 “경기는 못 뛰고 몰래 훈련하면서 1년 뒤에는 내가 꼭 저 사대에 서겠다고 다짐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성장하면서도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는 효녀이자 3명이나 되는 여동생들을 알뜰살뜰 챙기는 맏언니다. 장혜진은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으며 “지금까지 고생하셨으니 더 행복하게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반듯한 품성과 남다른 배려심을 지녀 많은 양궁인들의 장혜진의 2관왕을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그는 지난 4월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단 1점 차로 후배 강채영(20ㆍ경희대)을 제치고 최미선, 기보배에 이어 3위로 리우행 티켓을 손에 넣었을 때도 가장 먼저 강채영을 포옹하며 위로의 눈물을 흘렸다. 오 감독은 “운동선수는 독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성격이 좀 있어야 하는데 혜진이는 너무 착해서 손해를 본 적도 많다”며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와 너무 기쁘다”고 웃음 지었다.
금메달을 확정한 후 활짝 웃던 장혜진은 시상식에서 살짝 눈물을 훔쳤다. 그는 “선발전에서 힘들었던 과정이 생각나 애국가를 부를 때 울컥했다”며 “런던올림픽 선발전 4등 선수라는 꼬리표를 떼내서 후련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리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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