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4회째를 맞은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1971년 창설해 40여 년간 국내 유일의 지역 예선 없는 통합 토너먼트 대회로 야구인들의 인기와 사랑을 독차지했다.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인 야구선수의 ‘선수 출신’ 신분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 등록한 사실 여부로 결정할 만큼 권위를 인정 받는 대회다. 매년 전국대회 중 마지막으로 열리는 봉황대기는 모든 고교팀이 제한 없이 출전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각종 이변이 속출하는 명승부가 연출되며 ‘전국구 스타’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다른 대회에서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무명 선수들에겐 선망의 무대였다.
그 결과 김재박, 선동열, 이승엽 등 수많은 국내 프로야구 스타플레이어들이 봉황대기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흥미로운 건 현해탄을 건너 일본프로야구에도 봉황대기에 참가했던 주인공들이 지금도 왕성하게 지도자로, 팀의 간판타자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야구협회에 보관된 역대 봉황대기 참가 선수 명단을 살펴 보면 올 시즌 한신 타이거스의 지휘봉을 잡은 가네모토 도모아키(48)가 1986년 제16회 대회에 재일동포 야구단으로 모국을 방문했다. 한국명 김지헌으로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재일동포 3세다. 현역 시절 1,492경기에서 1만3,686이닝 무교체 출전의 신기록을 보유한 ‘철인’으로 히로시마를 거쳐 2002년 시즌 후 한신으로 옮겨 4번타자를 맡아 2003년과 2005년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앞장섰고, 은퇴 후 감독까지 맡게 된 구단의 레전드다.
역시 한신 출신으로 지금은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황진환)도 가네모토 감독과 같은 해 같은 재일동포 팀으로 봉황대기에 출전했다.
히로시마의 4번타자인 아라이 다카히로(39)는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던 1994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24회 봉황대기에 긴조 다쓰히코(김용언)와 함께 재일동포 야구단의 4번 타자로 출전해 팀을 8강까지 이끌었다. 긴조는 요코하마 출신으로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일본 대표로 출전했으며 지금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프로야구의 현역 감독과 4번타자가 한국의 고교야구 대회에 참가하게 됐던 건 봉황대기의 획기적인 발상 덕분이다. 조희준(55) 프로스포츠협회 위원이 한양대 대학원에서 최근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한 백상 장기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봉황대기 창설을 주도했던 백상 장기영은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를 다니던 1933년 모교가 여름 고시엔 대회의 조선지역 예선인 ‘제13회 전선중등학교야구대회’ 결승에서 목포상업을 5-1로 제치고 일본 본토에서 열린 고시엔 본선에 출전하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품고 훗날 실천에 옮겼다. 본보 창간 직후 일본팀 초청 경기를 기획했는데 당시 한국은 일본과 수교국이 아니어서 벽에 부딪히자 장기영은 일본인은 아니지만 그들과 비슷한 야구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재일동포에게 눈을 돌렸다. 1956년 7월28일 토요일 본보 3면에는 ‘본사가 보내는 공전(空前)의 대구연(大球宴)’이란 특집물이 실렸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의 시작이었다. 조 위원은 “장기영은 아예 재일동포 야구단까지 참가하는 고교야구대회를 구상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대회가 1971년 8월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제1회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한국고교야구연맹 창립 기념 고교야구대회’였다. 방학 중인 8월로 시기상의 문제도 해결했다”고 기술했다. 재일동포 팀은 1972년 2회 대회부터 참가해 1997년까지 한국을 찾아 한국 야구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됐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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