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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디자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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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디자인인가?

입력
2016.08.1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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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디자인

리카르도 팔치넬리 지음ㆍ윤병언 옮김

홍디자인 발행ㆍ416쪽ㆍ 1만5,000원

1524년 어느 날, 이름 난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교황의 근위병에게 체포돼 바티칸 감옥에 투옥됐다. 한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아주 소름 끼치는 데다 불순하기 짝이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2016년 지금, 이탈리아 출신 현역 디자이너 리카르도 팔치넬리가 그의 죄목을 밝힌다. 바로 ‘디자인’이다.

사진은 마르칸토니오가 복제해 배포한 그림 중 일부. 저자는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혹은 이들을 유혹할 목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홍디자인 제공
사진은 마르칸토니오가 복제해 배포한 그림 중 일부. 저자는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혹은 이들을 유혹할 목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홍디자인 제공

사건은 이렇다. 당시 상류 사회에는 지금으로 따지면 포르노나 다름없는 그림을 화가에게 청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유능한 화가 줄리오 로마노는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남녀의 성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행위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판화가 전공인 마르칸토니오는 그 기쁨을 나누어 두 배로, 세 배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그림을 베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결과적으로 줄리오는 처벌받지 않았고 마르칸토니오는 처벌받았다. ‘야한 그림을 그렸느냐’가 아니라 ‘대중에게 배포했는가’로 죄가 갈렸다.

'디자인'이라는 말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렬하고 극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저자는 냉동식품 포장지, 지하철 시간표, 수학책, 여권의 활자, 가구 조립 설명서, 심지어 미국 대통령의 얼굴까지 디자인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디자인은 도처에 널려 있다. 사진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장품 광고. 홍디자인 제공
'디자인'이라는 말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렬하고 극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저자는 냉동식품 포장지, 지하철 시간표, 수학책, 여권의 활자, 가구 조립 설명서, 심지어 미국 대통령의 얼굴까지 디자인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디자인은 도처에 널려 있다. 사진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장품 광고. 홍디자인 제공

디자인은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다. 슈퍼마켓의 상품부터 상표, 서체, 영수증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막상 설명하고자 하면 말문이 턱 막히는 어떤 것으로 디자인은 존재해왔다. 저자 리카르도는 ‘시각디자인: 좋은 것에 담긴 감각과 생각’을 통해 500년 디자인의 역사를 21가지 테마로 나눠 탐구한다. 저자 역시 “윤곽을 또렷하게 추적한다는 것은 힘들다”며 디자인을 정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도처에 널려 있고” “시선에 포착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부 디자인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내 저자는 그저 “디자인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20년 간 '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답해왔던 디자이너인 저자 리카르도 팔치넬리는 전문가들이 아닌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책을 냈다. 홍디자인 제공
20년 간 '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답해왔던 디자이너인 저자 리카르도 팔치넬리는 전문가들이 아닌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책을 냈다. 홍디자인 제공

좌절은 이르다. ‘넌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니?’라는 질문을 20년 동안 계속했던 어머니 덕에 관록이 쌓인 저자는 대중을 위한 디자인 입문서를 만들 수 있었다. 2년 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지금까지 예술 및 디자인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해왔다. 책은 디자인을 둘러싼 여러 개념과 요소들을 분리하며 세심하게 살핀다. 일정한 상황에서 발견되는 특징들을 나열하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이 한 꺼풀씩 벗겨진다.

가령 “영화배우들을 위해 일하는 미용사” “광고를 위해 요리하는 요리사”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쓴 작가”는 ‘비슷한 공정을 반복한다는 점’ ‘대량 판매를 위해 설득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 그리고 ‘최상의 효과를 얻고자 스피치를 설계한다는 점’ 때문에 각각 디자이너에 속한다.

모더니즘 이후 디자인이 풀어내지 못한 질문 역시 책은 과감히 싣는다. “디자인이 과연 예술인가”가 그것이다. 저자는 디자인과 예술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거나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완독 후에도 디자인의 형태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이 디자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책은 제 몫을 다 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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