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러시아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백야(白夜)를 하얗게 새워보는 것이었다. 여름과 밤, 극지대가 필요했다.
2014년 7월21일 오후 8시20분쯤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발역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 유럽풍의 역사로 들어가면서 모든 가방과 소지품은 x선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가방을 질질 끌면서 1개 층 아래로 내려가니 개찰구가 나왔다. 드디어 횡단열차 승강장이다.
승강장 왼쪽으로 한참 걸었다. 가이드가 갑자기 일행들을 세우더니 “객차 반대 방향으로 잘못 왔다”고 했다. 피곤에 지친 여행객들의 불평이 터져나오려는 찰나,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러시아 황실문양인 쌍두독수리가 조각된 기념탑이었다. ‘9288’이라는 숫자가 박혀있었다.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 구간의 총 길이, 9,288㎞였다.
이 탑은 1891년 5월31일 스물세 살의 니콜라이 황태자(니콜라이2세)가 참석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착공식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날 착공한 횡단열차는 황태자가 황제로 제위하던 1916년 10월18일 마침내 개통됐다.
니콜라이2세는 불과 몇 개월 후인 1917년 3월2일 레닌의 혁명에 의해 폐위됐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가 된 그는 가족들과 함께 바로 자신이 건설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우랄산맥 근처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됐다 1918년 7월16일 살해됐다.
객차 앞에는 제복을 입은 여성 여객차장이 한 명씩 서 있었다. 한 명씩 표 검색 절차를 거치고는 기차에 오른다. 스포츠 마니아 푸틴의 금연정책 때문에 일단 기차에 올라타면 담배를 피지 못하게 된 흡연가들은 출발시간까지 두 대고, 세 대고 계속 구워댄다.
열차에 올라타 좌석 찾는 것도 일이었다. 러시아어 반, 영어 반으로 된 열차표에는 11호 객차, 10번 좌석이라고 찍혀있었다. 그런데 이 열차는 4명이 방 한 칸을 쓰는 쿠페, 침대차였다. 침대마다 좌석 번호가 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10번 방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객차에는 9번 방까지밖에 없었다.
좁아터진 통로에 20㎏짜리 가방 끌고, 배낭매고, 카메라 목에 매고 왔다갔다하려니 장난이 아니다. 결국 10번 침대를 찾는데 성공했지만 여객차장의 앙칼진 얼굴이 다가왔다. 러시아말로 쏘아부치는데 “자리도 못찾니, 등신아”하는 말투였다.
좌석과 바닥에 가방을 팽개치다시피 하고 객차 구경에 나섰다. 복도 끝에는 온수기가 있어 컵라면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화장실이 하나뿐인데다, 수도꼭지도 화장실 안에 하나였고, 그나마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횡단열차를 자주 타 본 승객들은 탁구공을 하나 준비한다고 했다. 마개가 없는 세면대에 물을 받기 위해서란다.
열차는 밤 9시15분 출발했다. 사실 밤이라고 하기에는 바깥이 너무 훤했다. 저녁 9시15분이 맞는 말이겠다. 역사를 빠져나온 열차는 이제 모스크바까지 일주일을 꼬박 달릴 것이다. 창밖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초록색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객실에는 아래쪽 위쪽 침대가 2개씩 있고 창가에 선반이 하나 있었다. 먼저 아래쪽 침대를 들쳐 가방을 넣었다. 그리곤 컵라면과 팩 소주, 마트에서 산 연어 안주, 과자 등을 선반 위에 늘어놨다. 룸메이트와 시베리아의 추억을 나눌 조촐한 소품들이었다.
그때 여객차장이 불쑥 객실로 고개를 들이민다. 그런데 웬걸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것이 영 딴 사람이다. 손에는 한 가득 기념품이 쥐어져 있었다. 시베리아의 낭만을 위해 하나 사주고 싶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다. 다들 말이 안 통하니 손으로 파리 쫒듯 내보내 버렸다. 그 후 이 아줌마 얼굴이 다시 심통 모드로 돌아가버렸다. 마치 9번 사옥까지 책임지고 있는 여간수의 얼굴이었다.
어느덧 창밖에 어둠이 내렸다. 이제는 창 밖 풍경보다는 “덜커덩”하는 소리가 크게 다가온다. ‘일야구도하기’에서 물소리만 귀에 들어왔다는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가 오버랩된다.
이것 저것 뒤적거리다 열차표를 찬찬히 들여다보자니 뭔가 이상했다. 현지시각으로 7월21일 밤 9시15분 블라디보스토크발 열차를 탔는데, 9시15분 혹은 21시15분이라는 숫자를 눈 닦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출발시간은 그냥 ‘14:15’로 찍혀있고, 하바로브스크 도착시간은 ‘01:15’로 찍혀있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면 일단 끼워 맞춰보고 역으로 추리하는 수밖에 없다. 14:15면 오후 2시15분이다. 출발시간이 9시15분이니 7시간 차이다. 블라디보스토크와 7시간 시차가 나는 곳은 바로 모스크바다. 답이 나왔다.
러시아에는 모두 11개의 시간대가 있다. 동서로 길기 때문이다. 러시아 열차시간표를 11개의 현지시각 기준으로 적용하면 아마 시간계산하다 기차 놓치는 승객이 엄청날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 모든 역과 열차의 기준은 모스크바 시간이다. 생각해보니 블라디보스토크 역사 정중앙의 시계와 역 구내 시계도 모두 모스크바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마다 조촐한 친교의 시간은 끝나고 불이 꺼진다. 냉방장치는 아주 잘 작동하는 편이다. 한여름 감기가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사람은 잠들어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달리고, 또 달린다.
아침 5시 정도되니 한 두 명씩 일어나 일출을 구경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일출이다. 태양도 어제 떴던 태양이고, 기차도 어제 달리던 기차지만 사람이 바뀌니 모든 것이 달라보인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전쟁이 시작됐다. 화장실에 늘어선 줄이 장난 아니다. 우리 객차의 40명 가까운 승객이 한번씩 이용해도 몇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변비가 있을 경우 시간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게다가 세수도 하고, 칫솔질도 하며, 여성들은 화장까지 하기도 하니 뒷줄에 선 사람은 장이 꼬일 수밖에 없다.
오전 8시15분 일행은 하바로브스크에서 내렸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전 1시15분이다. 이것으로 짧게나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경험했다. 간혹 시베리아 횡단열차 전 구간을 타는 여행객들이 있다고 한다. 사흘까지는 음악도 듣고, 영화와 책도 보며 열차의 낭만을 추구하지만 5부능선을 넘어서면 시베리아 횡단감옥을 체험한다는 것. 덥수룩한 몰골로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에게 낭만은 사치라는 말이었다.
하룻밤 기차 여행이면 충분하다는 여행 팁이었지만 왠지 꾀죄죄한 몰골로 열차에서 내리는 그 누군가가 부럽기만 하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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