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도 ‘걸크러시’(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 열풍이 불까. 오랜만에 여성영화가 극장가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430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6월 말 개봉한 ‘굿바이 싱글’이 김혜수의 코미디 연기를 내세워 210만 관객을 만났다. 단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여성 동성애와 10대 미혼모 문제 같은, 금기시되던 소재로 여성영화의 대중성을 확장하고 관객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에 의미를 둘 만하다.
경쟁 열기가 절정에 다다른 여름 성수기 극장가에서도 여성영화들이 활약하고 있다. 3일 개봉한 ‘덕혜옹주’는 제목 그대로 조선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굴곡진 삶을 그린 영화다. 그간 영웅적 인물을 영화화한 사례는 많았지만, 한 여성의 일대기를 긴 호흡으로 조명한 영화는 거의 없었다. 덕혜를 연기한 주연배우 손예진은 한국영화에 드문 여성 이야기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역사 인물이 아닌 한 여인의 인생을 봐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덕혜옹주’는 7일까지 170만5,144명을 모으며 흥행 청신호를 켰다.
10일 개봉하는 ‘국가대표2’는 2003년 일본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국가대표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눈물겨운 도전기를 담았다. 한국영화에 드문 스포츠영화, 그것도 여성 스포츠영화인데다, 심지어 상설팀 하나 없는 비인기 종목인 여자 아이스하키를 다뤘다. 그야말로 핸디캡투성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뒤 기대 이상의 호평을 얻으며 극장가 복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부산행’과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터널’과 함께 여름 극장가 ‘빅5’로 꼽을 만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덕혜옹주’와 ‘국가대표2’는 각 배급사가 자신 있게 내놓은 여름 ‘텐트폴’ 영화라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이 쏠린다. 남성 중심의 장르 영화 일색이었던 여름 극장가 풍경에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 영화사 관계자는 “그간 여성영화는 흥행이 잘 돼도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기획단계부터 약점 극복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며 “여성영화가 여름 성수기에 개봉한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영화들이 흥행에서도 성과를 낸다면 여성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한 좋은 선례가 돼, 향후 여성영화들의 기회를 넓히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덕혜옹주’와 ‘국가대표2’에 이어서 이달 말에도 여성영화 2편이 나란히 개봉한다. ‘범죄의 여왕’과 ‘최악의 하루’가 25일부터 맞대결을 펼친다. ‘범죄의 여왕’은 아들의 고시원 수도요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또 다른 사건을 마주한 아줌마 미경(박지영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최악의 하루’는 과거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 새로운 남자를 하루에 모두 만난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달 초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한 기대작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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